[43호] 누구나가 예술가 시대, 예술이란 무엇인가? | 오정학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2-25 23:21
조회
2202
누구나가 예술가 시대, 예술이란 무엇인가?
『예술인간의 탄생』 서평


오정학(조경가, 경기도시공사)


* 이 글은 2015년 3월 2일 인터넷신문 대자보에 게재되었습니다.
http://www.jabo.co.kr/sub_read.html?uid=35493&section=sc4&section2=


1. 누구나가 예술가인 시대

“비록 아름답게 장식하진 못했지만 일종의 예술이었다.” 이근안의 항변이다. 도대체 예술이란 무엇인가? 무엇이기에 악명 높은 고문기술자마저 스스로를 예술가로 칭할까? 위키피디아는 예술의 중심 개념이 ‘아름다움’에 있고, “이것이 없으면 예술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정의한다. 따라서 아름답지 못했다고 자인한 자신의 과거를 ‘예술’로 포장하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이자 철저한 자기기만이다. 잔인한 고문마저 ‘예술’로 치장될 만큼, 지금은 누구나가 예술가다. 물론 예술이 과도한 권위를 가져야 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오늘날의 예술행위는 대중의 관심과 참여 속에서 이루어질 때가 많다. 그 결과 모든 분야에 걸쳐 예술의지가 드높고 많은 문화적 산물이 쏟아지고 있다.

“예술은 사람들을 결합시키고 사람들에게 감정이나 사상을 전달하는 수단이 된다(위키피디아).” 예술행위는 미의식의 인식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아름다움’은 감각기로 느끼는 감성적인 대상이다. 그것을 이루어 낸 인간의 의식, 사상, 신념 등의 내면세계인 기의(signified)를 담고 있는 기호이기도 하다. 따라서 모든 것이 예술이고, 누구나 예술가인 시대는 기호와 상징이 촘촘한 사회로 볼 수 있다. 그것들은 발달된 전자 매체에 힘입어 개인들에게 빠르게 공유된다. 현대의 기술 문명은 누구나 예술품을 원판 그대로 감상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전유하지 못할 때, 자칫 구경꾼 혹은 소비자로 전락할 수 있는 스펙타클의 위험성도 그만큼 커졌다.

『예술인간의 탄생』은 이러한 문제 인식을 담고 있다. 저자 조정환은 최근 10여 년간 『비물질노동과 다중』(2005), 『레닌과 미래의 혁명』(2008), 『공통도시』(2010), 『인지자본주의』(2011), 『인지와 자본』(2011) 등을 펴냈다. 인지자본주의를 비롯한 정치철학적 주제가 많다. 따라서 ‘예술’에 대한 관심은 언뜻 이례적이다. 그러나 예술의 사회변화성과 현대사회에서 정치⋅자본과의 관계성을 생각한다면, 미학과 정치학은 분리 불가능함을 수긍하게 된다. 당연히 예술미학 역시 그의 관심권 안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민중미학연구회와 문학예술연구소에서 시작하여 대학 강의와 『실천문학』, 『노동해방문학』에 관여하며 미학의 사회적 실천을 고민했다. 그 뒤 <다중지성의 정원>에서 학생, 근로대중, 지식인 등과 함께 미학-시학 세미나를 하면서 예술미학에 대한 관심을 이어왔다. 『플렉서스 예술혁명』(2011)을 거쳐서 나온 『예술인간의 탄생』은 그런 그의 족적을 그대로 보여준다.

예술은 혁신성, 진보성, 창의성과 같은 속성상 본래 비체제적이었다. 이 때문에 “예술가는 집단보다는 예외적 개인으로, 비정상으로, 정신적이기보다는 기술적인 존재로, 비합리적인 인간으로, 일탈적 개인으로 취급되어 왔다.”(338쪽) ‘예술을 한다’는 것의 의미는 생산성과는 부합되지 않는 의미였다. 그러나 인지자본주의는 예술을 생산을 위한, 소비를 위한, 새로운 에너지로 교묘히 활용하고 있다. 정치체계 또한 예술의 효용성에 주목했는데 이는 지나간 전체주의 사회에서 도드라지게 관찰된다. 이제 예술은 사회의 주요한 기준이자 원리가 되어 가고 있다. 사회경제적인 질서의 의미가 커지고 있는데, 이러한 점에서 예술은 이미 정치적이다. 정치야 말로 새로운 시공간적 배치를 만들어 내는 질서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 종합판이 바로 인간이 만들어 낸 ‘도시’에 있다. 도시야 말로 정치와 자본, 예술이 집결된 인간의 공간이다.

2. 도시공간에서 예술의 양면성

현대 도시의 발전은 “예술가들의 예술행위와 인지노동에 의존하고 있다.”(215쪽) 도시의 발전은 사람이 모여들면서 시작되는데, 이는 예술가들이 도시환경을 문화적⋅환경친화적 관점에서 재조직하여 자극 지대로 만듦으로써 가능했다는 해석이다. 그만큼 오늘날의 도시에서는 예술과 문화가 유난히 강조된다. 이러한 흐름은 ‘세계 디자인 수도’, ‘유네스코 디자인 창의 도시’ 등에서 보듯 이미 지구적이다. 앞선 근대화로 양적 발전을 먼저 이룬 서구에서 앞장서 가고 있다. 세계화된 도시 서울도 세계 디자인 수도로 2010년에 뽑혔는데, 바로 그해에 유네스코 디자인 창의도시에 같이 선정되었다.

그러한 위상에 맞게 서울의 건조물은 어느 것 하나 그냥 설치되지 않는다. 공공 건축물은 물론이며 교량, 육교, 도시공원 등의 주요 시설과 작은 스트리트퍼니처 하나하나가 다 그렇다. 모두 이중 삼중의 디자인 평가를 거쳐 자리를 잡는다. 이 과정에서 여러 개의 디자인 대안이 만들어진다. 그 대안들은 3차원 디지털 이미지로 처리되어 예술가들의 엄정한 심사를 거친다. 도시의 예술성은 거시적으로 경관 계획의 틀 속에서 풍경을, 미시적으로는 공공디자인의 잣대로 디테일을 점검하고 조정한다. 공간의 질서에는 이렇게 디자인적 논리, 예술적 원리가 점점 크게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 디자인 수도를 국제산업디자인협의회에서 선정하듯이, 그 뒤에는 권력화한 예술이 있고 자본의 논리가 꿈틀댄다.

현대 도시는 “도시 자체를 미술관으로 삼는 예술세계의 대도시적 확장”(209쪽), 특히 랜드마크적인 “명소” 개발을 도시의 경쟁력으로 내세운다. TV, 인터넷과 같은 대중매체로 끊임없이 소개되는 현대판 명소는 대개 교환가치가 지배하는 자본의 공간이다. 공간의 타자지향성, 획일성과 표준화, 휴먼 스케일과 질서의 결핍을 특성으로 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무장소적이다. 이 때 예술은 심미성의 이름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청계천, 한강 르네상스, 동대문 디자인플라자, 서울역 고가도로 등이 모두 예술과 문화의 이름을 내걸었다. 필요성은 적지 않았으나 정치적인 복선, 그로 인한 졸속 진행, 이해관계의 충돌로 매우 양가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그 과정에서 예술은 데코레이션의 수단, 예술가는 방패막이의 역할에 적잖이 충실했다. 예상의 두 배에 이른 공사비, 계속 들어가는 막대한 유지관리비, 주변과의 부조화에 따른 몰역사성은 상업적 활용을 위한 무리한 예술재현과 키치적 생태재현의 값비싼 대가였다.

관광객이 꽤 몰린다지만 그 뒤안길에는 원주민의 눈물과 몰락이 숨어 있다. 외면적인 화려함 못지않게 그늘이 크다는 점에서 “메트로폴리스는 수탈하는 자와 수탈당하는 자로, 채권자와 채무자로, 금융 귀족과 신용불량자로, 한마디로 말해 채무노예와 노예소유주로 양극화된다.”(217쪽) 도시에서 경제적 계급의 양극화는 공간의 양극화와 함께함을 알 수 있다. 이를 막기 위해 예술은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고,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할까?

3. 공동체를 위한 다중의 예술

예술은 과연 도시공간 변화의 원동력이 될 수 있을까? 예술이 가진 창의성과 신기성, 즐거움은 사람들의 열정을 불러일으키는데, 집합된 열정은 문화적인 동력이 된다. 예술이 가진 진보성과 혁신성, 포용성, 다양성 등은 발전적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 또한 집합열정과 예술적 일체감은 문화적 공감대를 높여 사회성의 좋은 접착제가 되므로 공동체성 함양에도 그만이다. 그러한 점에서 예술이 가져올 변화에 대한 기대는 접기 힘들다. 이 책은 도시공간적 측면에서도 몇 가지 시사점을 던져 주었다.

보론에서는 도시공간에서 삶권력과 삶정치의 대립과 갈등을 짚은 뒤, 도시 풍경을 바꾸는 방법으로 선거, 탈주, 혁명을 제시했다. 물론 그 이외에도 다양한 선택의 가능성을 열어 두었다. 탈주와 혁명의 사례로는 마을 만들기와 점유를 들고 있다. ‘마을 만들기’는 현실적으로 진행이 가장 활발하다. 주거 및 지역공간 조성에서 주민 참여의 폭을 넓히는 데 일차적인 목적이 있다. 그 과정에서 주민은 비로소 객체가 아닌 주체로, 구경꾼에서 행위자로, 단순 소비자에서 생산과 소비의 전 과정 참여자로 탈바꿈한다. 물론 복잡한 의사 결정 과정을 거쳐야 하며 전문지식이 부족해 때로는 학습과 토론을 거쳐야 한다. 그래서 더 힘들고 더 더디면서도, 질적 수준은 오히려 더 낮아질 수 있는 문제점이 있다.

그럼에도 이러한 기획에 주목하는 것은 생산물로서의 ‘결과’보다 함께하는 ‘과정’에 집중하기 위해서이다. 도시를 자본의 산물이 아닌 공동체의 장소로 만들기 위함이다. 공통적인 것의 구축이야 말로 삶정치의 핵심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본에 맡기거나 전문가적 기획으로 쉽고 안전하게 가기 보다는,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써서라도 주민의 직접적인 참여를 꾀한다. 이 과정에서 전문예술가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하다. 다만 이제는 예술가 혼자만의 고독한 작업이 아니라 함께하는 소통력이 필요한데, “다중이 배워야 할 능력을 앞서 보며, 다중을 예술적으로 선취하고, 이를 통해 다중화 되어 가는”(243쪽) 열정이 요구된다.

이 책은 현대의 인지자본주의, 혹은 감성사회에서 예술의 새로운 의미와 역할을 생각해 보게 한다. 도시공간의 스펙타클과 상품화 경향은 예술을 수단적 존재, 예술가를 전위적 존재로 활용해 왔다. 문화의 시대, 감성의 시대에서 도시는 권력과 삶이 날카롭게 부딪치는 공간이다. 당연히 예술의 역할은 한층 더 중요해졌다. 이제 예술은 삶정치의 본질이자 활기인 동시에, 도시공간 변화의 새로운 원동력이 될 수 있음을 일깨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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