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호] ‘자유로운 나’의 아이러니에 빠지지 않고 ‘나’로서 살아가기 위해 | 김미정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2-26 00:09
조회
1528
‘자유로운 나’의 아이러니에 빠지지 않고 ‘나’로서 살아가기 위해
『나 자신이고자 하는 충동』 서평


김미정(문학평론가)


* 이 글은 2015년 5월 14일 웹진 『문화 다』에 게재되었습니다.
http://www.munhwada.net/home/m_view.php?ps_db=letters_en&ps_boid=33


80년대 생의 2000년대 소설에 관심을 가진 적이 있다. 90년대 한국문학의 ‘나’와 구별되기를 원하는 ‘나’에 대한 소설이었고, 80년대적인 집단, 공동체로부터 이탈하여 자유로워진 90년대의 ‘나’들과 달리 그 자유로움 자체를 곤혹스러워하는 ‘나’들에 대한 소설이었다.

그중, “실체 없는 거대계획에 포섭된 것일까요.(...) 나는 그제야 그 계획이 강경하고 명확한 하나의 이름으로 떠오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이름 앞에서 우리는 우리가 가졌던 많은 이름들을 버려야 했던 것입니다.”(한유주, 「세이렌 99」, 『달로』, 문지, 2006 : 그러나 소설 속에서 이 ‘이름’이 무엇인지는 결코 명명되지 않는다.)라거나, “자꾸만 내 삶이 위협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누구/무엇으로부터 위협받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는” “불안함”이(한유주, 「그리고 음악」, 같은 책) 토로되는 장면.

혹은, “그렇게 개별적으로 고립된 채 집단에 짓눌려 가장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는 동안에도 사람들은 스스로의 자발적인 선택에 따라 가장 고립되고 개별적인 죽음을 맞이하였다며 미소 속에 눈을 감을 것이다. 그러나 그 미소조차 그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눈동자를 짓누르는 시스템의 미소이다. 이것은 엄밀히 말해서 삶도 죽음도 아니다. 그러나 이런 삶과 죽음이 도처에서 반복되며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들을 서서히 질식시켜가고 있다.”(김사과, 『미나』, 창비, 2008 : 여기에서도 ‘시스템’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명명되지 않는다.)는 에세이즘적 진술들의 반복.

여기에서 읽을 수 있는 ‘나’들의 심적 상태나 소설의 정조는 확실히 ‘불안’이라 할만한 것이었다. 두 작가의 소설들 모두에서 ‘이름’ ‘시스템’으로 명명된 것은, 단 한 번도 구체화되어 이야기되지 않는다. 공포와 비교하자면 불안은, 대상의 명확한 인지불가능 상태에서 비롯되는 심적 상태다. 위협을 불러일으키는 구체적인 대상이나 명확한 실재가 없을 때 발생하는 것이며, 삶의 토대를 잃었을 때 겪는 안절부절함이기도 하다. 소설 속 ‘나’들의 불안은, 정체모를 무언가가 발밑, 등 뒤에 있는 것은 알고 있으나,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자유롭다는 착각 하에서 살다가 시스템의 부속으로 죽어가는 것을 깨닫는 ‘개인’의 불안이기도 했다.

지금, 이 소설들의 ‘불안’을 읽던 그때와 비슷하면서 달라진 변화들을 떠올려본다. 그 ‘나’들이(이때의 ‘나’는 강조하지만 ‘80년대와 대타적으로 구성된 90년대 문학에서의 나’와는 ‘또 다시’ 변별되기 원하는 ‘나’들이었다.) 무엇에 대해 불안해했는지는 이제 사후적으로나마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나’들이 의식한 ‘정체모를 거대 계획/시스템’은 이제는 그 정체를 전면화했다. 그리고 이 ‘나’들의 불안의 정동은 지금 그 대상이 분명해짐으로써 공포건 분노건 무기력이건 어떤 식으로 이행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나’, 다이쇼기의 ‘나’

오늘날 ‘신자유주의’는 체제, 이론의 문제를 넘어 개개인의 구체적인 삶, 일상에 틈입해 각자의 신체 레벨에까지 내면화되어 있다. 앞의 소설 속 ‘나’들과는 달리 지금의 ‘나’들은 과잉계몽되어 있다 해도 될 정도로 이 시스템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이론적으로 신자유주의는 개인의 권리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강고한 사적소유권이나 법의 지배, 자유롭게 기능하는 시장, 자유무역의 제도들을 중시한다. 이때의 ‘자유’와 ‘개인’이라는 이념은 ‘나’의 무한한 자유로 착각되지만, 사실은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전면적으로 스스로에게 지우는 무시무시한 이중구속의 논리임도 이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누군가의 실패는 구조적 문제이기 이전에 개인의 문제이고, 모든 것은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이므로 스스로가 책임져야 할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 자유는 유대의 결여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들거나, 심지어 타인의 고통과 슬픔 앞에서도 나의 무고함만을 확인하며 관여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자연스런 감각처럼 만들기도 한다.(단적으로 2014년 4월 16일 이후 노골화된 어떤 감성들의 도드라짐 속에서도 그런 것을 확인한다.) 내 것이 아닌 개인들의 고통은 안타깝고 슬프지만 어쩔 수 없다고 여기는 이 무기력은, 모든 것을 개인적 차원의 것으로 환원시키는 것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해온 신자유주의 시스템의 산물이기도 하다. 지금 ‘개인’들은 점점 유대 없는 단독자, 매개 없이 시스템에서 홀로 고투해야 하는 존재가 되어 가고 있다. 유대의 결여와 무기력은 서로가 서로를 인과적으로 작동시키고 있다.

『나 자신이고자 충동』(갈무리, 2015)에서 구라카즈 시게루는 이런 신자유주의 시대의 ‘자유’와 ‘나’와 ‘개인’의 향방을 물으면서 논의를 시작한다. 지금의 개인들은 국가나 종교, 가족, 직장 등의 일체의 공동체의 리얼리티가 사라지고 사람들은 자신의 사는 의미를 스스로 찾아내야하면서 “삶의 완충재 없이” 세계에 “알몸으로 내던져” 있다고 한다. 이 책의 미적 아나키즘이 발생할 상황은 적극적으로 지금의 맥락에 정위(定位)될 수 있다. 지금의 시대와 다이쇼기는, 이전의 공고했던 상징적 질서나 가치가 쇠락하고 그 토대가 액상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확실히 ‘구조적’ 조건을 공유한다. 특히 개인의 생을 넘는 가치들(국가, 종교, 직장, 가족)이 더 이상 초월적으로 기능하지 않는 상황은 이 책이 다루는 20세기 초와 지금을 관통한다.

하지만 이 겹쳐읽기에는 다소 주의가 필요하다. 당연하겠지만, 다이쇼기의 ‘나’ ‘개인’과, 오늘날 ‘나’ ‘개인’을 등가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다이쇼기의 ‘나’ ‘개인’은 그 이전 시기까지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고 해도 무방한, 근대적 의미에서 ‘발견된’ ‘개인’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나’ ‘개인’은 근대화 프로젝트 이후의 ‘나’ ‘개인’이다. 적어도 한국에서만 해도, 여러 맥락의 공동체의 명멸 속에서 재맥락화를 거듭해온 것이 ‘나’ ‘개인’이다. 즉, 이 책은 지금의 문제를 좀더 역사적이고 근본적으로 사유하기를 원하고 있다.

관동대지진이라는 모멘트

『나 자신이고자 충동』은 20세기 초반 일본에서의 미적 아나키즘의 기획을 계열화한다. 부제 ‘관동대지진에서 태평양전쟁 발발까지의 예술운동과 공동체’는 이 책에서는 다루는 시기와 대상을 잘 드러낸다. 특히 관동대지진의 경우는 어떤 거대한 변동의 계기이면서 순간이고 사건이며 축적이고 벡터이다. 2011년 3·11과 마찬가지로 삶의 달라진 양태와 감수성의 이행을 구체적으로 환기시키는 역사적 모멘트였던 것이다.

일본 근대문학 연구자 미요시 유키오(三好行雄)는 관동대지진을 “흔들리는 대지”라고 표현하면서 자연적 피해의 영역을 뛰어넘어 훨씬 깊게 사회와 문화의 근저를 뒤흔든 대사건이었다는 이야기를 한 바 있다.(『일본문학의 근대와 반근대』, 정선태 역, 소명출판, 2002) 현상적이고 가시적인 변동과는 다른 방식으로 “기성 문학이념의 붕괴를 재촉”한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에게 관동대지진은 “일본이 처음으로 ‘전후(1차 세계대전 전후: 인용자)’를 의식하게 된 사건”이었다.(『현대일본의 비평』, 송태욱 역, 소명출판, 2002) 이때의 가라타니의 말대로 “관동대지진이 다이쇼적인 것의 끝”을 의미하는 한, 미적 아나키즘은 다이쇼기에 발흥한 것이면서 동시에 다이쇼적인 것과 결별/부정하는 의미를 이미 함축한 셈이다. 실제로 이 책의 제목을 제공한 아리시마 다케오(有島武郞)는 관동대지진 직후 스스로 목숨을 끊고, 이 책에서 포스트 백화파로 지목되는 이들의 전신인 백화파(白華派)는 창간 14년만인 그해에 해체한다. 일본문학사에서는 바로 이 대목에 전위예술과 프롤레타리아트 문학을 기입한다. 그런데 구라카즈 시게루는 이 대목에서 ‘나’의 현재의 생명(삶)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예술의 모델화를 꾀했다. ‘미적 아나키즘’이 그것이다.

‘미적 아나키즘’이란 무엇인가

이 책에서 비중 있게 언급되는 예술가들은 아리시마 다케오, 곤 와지로, 하기와라 교지로, 우노 고지, 에도가와 란포, 가와바타 야스나리, 다니자키 준이치로, 야나기 무네요시, 요코미쓰 리이치, 미야자와 겐지, 야스다 요주로 등이다. 이들만 두고 보았을 때는 어떤 공통항이 쉽게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저자는 이들을 통해, 개인의 ‘생’의 창조성을 최대한 존중하는 예술의 모델을 읽어내고, 미적 아나키즘의 계보로 재맥락화한다.

특히 이들 중에서, 자율적인 개인 사이의 유대를 지향하는 미적 아나키스트와 낭만주의적 어소시에이션을 주목한 대목들은 저자의 미학적, 정치적 ‘입장’이 강하게 반영된 듯 보여 흥미롭다. 말하자면, 미적 아나키즘은 전위예술과 겹쳐지는 한, 자칫 독아적 ‘나’의 차원에서만 속류적으로 이해될 소지도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다루는 이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미적인 것을 통해 보다 자유롭고 해방적인 사회가 가능하리라고 믿었다는 점이다.

이쯤에서 아나키즘에 대해 이해가 있는 이들에게는 다소 상식적일지라도, 저자가 말하는 미적 아나키즘의 특징을 잠시 정리해 두고 싶다.

첫째, 내재주의. 곧, 생의 궁극적 의의와 목적은 생 그 자체에 내재해 있다는 것이다. 즉, 생보다 우위에 있는 초월적 권위는 없고, 따라서 사회적 규범은 부정된다. 또한 개인의 욕구, 본능, 충동, 의지 등은 전면 긍정된다. 특히 천황이라는 권위와 대타적인 이 내재주의가 궁극적으로 현실정치에 대한 급진적 거부의 원리로 놓이는 것도 당연했다.

둘째, 생명[삶]에의 일원화. 비루한 일상의 작업으로부터 혁명을 통한 사회체의 창설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생의 확장의 표현이자 미적인 창조일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는 무화되고, 생활은 곧 예술적 실천이다. 확실히 이것은 저자의 말대로 ‘예술의 소멸’, 즉 예술과 예술 아닌 것의 경계를 무화시키는 논의의 선취였던 셈이다. 이런 맥락에서 미적 아나키즘을 당대 예술과 굳이 비교해보자면, 예술지상주의가 생보다 예술에 더 큰 가치를 부여했고(예술⊃생), 프롤레타리아트 미학이 예술보다 생을 더 우위에 두었다(생⊃예술)고 요약할 수 있다면, 미적 아나키즘은 생과 예술의 합치(생=예술)를 꿈꾸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반권위주의. 저자는 여기에서 단순히 권위에 반(反)하는 예술모델을 지목하는 것이 아니다. 이 반권위주의는 “내면적 자기해방과 억압된 것들의 정치적 해방이 생명[삶]의 확장이자 자기표현이라는 점에서 일치”한다는 것을 내포한다. 즉, 자기와 사회의 동시적 해방이 긍정되는 예술인 셈이다.

넷째, 노동=예술이라는 것. 이것은 앞에서 ‘생명[삶]에의 일원화’와 직접 관련될 이야기다. 노동 역시 표현이라는 것, 경제활동 역시 예술적 행위라는 것이다. 이때의 미적 창조=노동행위는 ‘집합적 주체’를 생산하는 것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 논리에 따라 미적 아나키즘은 ‘나’들 사이의 꼬뮌으로서의 집합적 주체를 상정하는 것까지 이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신자유주의의 통치술과 서브컬처

이 책은 다이쇼-쇼와기의 미적 아나키즘의 모델들만을 소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의미에서 지금의 신자유주의 시대의 통치술과 그에 대한 미학적·정치적 전략을 고민하게 한다. 지금 신자유주의 시대의 통치술이라고 다소 거창하게 표현했으나, 가령 이런 것이다. 90년대,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프리터’ ‘노마드’ ‘오타쿠’ 문화 같은 말들은 지금과 같은 위상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프리터’라고 하면 자유로운 노동 방식의 선택이 가능한 삶이라는 의미에서 긍정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의 프리터는 시장에서 자유롭게 교체 가능한 일회용 노동력으로 통용된다. ‘노마드’는 국경 없는 세계를 가로지르는 전략으로서의 의미를 지녔다. 하지만 지금은 다분히 글로벌 자본주의의 레토릭로 전유된 감이 있다.(2000년대 초반에 인터넷에서 검색되던 ‘노마드’와 현재 인터넷에서 검색되는 ‘노마드’를 비교해본다면 그 차이는 확연히 와 닿을 것이다.) 또한 ‘오타쿠’ 문화는 일본 내의 서브컬처로서 주류문화의 권위주의를 침식시킬 가능성 있는 소수자들의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커뮤니케이션 하지 않는 자족적 개인들의 문화, 그러므로 자본에 강하게 비끄러매어질 수밖에 없는 문화향유자의 이미지가 더 크다.

이 책의 에필로그에서 강한 비판의 대상이 되는 ‘서브컬처’ 역시 이런 측면에서 이해된다. 저자는 예술(이때 그가 말하는 예술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기술로서의 근대예술의 이념에 가깝다.)과 서브컬처를 비교하며, 서브컬처가 정작 인간의 자유를 횡령하고 있다는 우려를 강하게 표명한다. “그것은 이른바 우리들의 욕망, 정동, 환상까지도 절반 이상 자본에 의해 생산되고 있다고 간주하는 것”이고, “거기에서는 인간적인 자유, 주체성이라는 이념은 이전과 같은 순수함을 잃어버려서, 애매한 형태로만 부지되어 왔을 뿐”이라고 한다.

저자는 어떤 구체적인 대상을 지목하며 서브컬처를 비판하고 있지 않다. 그렇기에 이 부분은 다소 주관적이고 과잉된 독해를 할 수밖에 없는데, 대략 다음의 사정을 감안해서 읽어야 할 것 같다. 우선 서브컬처가 번역하자면 통상 ‘하위문화’가 되고, 이것은 60년대 이래 서구의 서브컬처의 성격을 반영한 말이다. 하지만 일본에서 서브컬처라고 했을 때, 이 60년대 서구의 서브컬처의 성격과는 부분적으로 공유하는 바가 있으나 동일하게 이해하기는 어렵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서브컬처는 일본의 전공투 이후 세대의 감수성과 80년대 고도소비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 성격은 균질적인 것이 아니고, 90년대 이후에는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분화되었다. 논자에 따라서는(예를 들어, 『스트리트의 사상』으로 알려진 모리 요시타카) 지금의 서브컬처를 ‘오타쿠적인 것’ ‘스트리트적인 것’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구라카즈 시게루가 ‘서브컬처’ 전반을 “원칙적으로 자본주의적인 상품”이라고 말한 것은, 일본의 80년대 고도소비사회라는 배경을 직접 지목한 발언인 듯하다. 또한 서브컬처를 “유사-자연으로서의 자본의 욕동에 몸을 맡기는 것에서 역설적으로 쾌락을 획득한다는 문화 실천을 총칭”하는 것으로 설정하고, 이것이 아즈마 히로키가 말한 ‘동물화’(=자연화)로 연결된다고 보는 한, 저자가 말하는 서브컬처는 소위 ‘오타쿠적인 것’과 관련될 수 있을 것 같다.

그 ‘오타쿠적인 것’으로서의 서브컬처란 어떤 것인가. 오타쿠 문화 자체에 대해서는 일천하여 조심스러운 바이지만, 그에 관한 개인적 삽화 하나를 통해 ‘오타쿠적인 것’으로서의 서브컬처를 이미지적으로 독해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2008년 가을 리먼 쇼크 직후, 동경대 교양학부 학생회가 주최한 아즈마 히로키(東浩紀)와 기타다 아키히로(北田曉大)의 대담 자리에 참석한 일이 있다. 서브컬처-오타쿠 비평에 관심 있는 당시 학부생들이, 200여명 수용 가능한 강의실을 빽빽이 채웠는데, 어딘지 위화감이 드는 그 날의 장면과 분위기가 기억난다. 이유모를 위화감 혹은 불편함의 이유는 다름 아닌, 그 자리에 모인 청중의 성비의 차이 때문이었다. 나를 포함해 단 5명만이 여자였고 나머지 195명이 넘는 청중 및 주관자는 모두 남자였던 분위기 속에서, 일본에서의 서브컬처 비평, 오타쿠 문화라는 것이 남성젠더적 특징을 갖고 있다는 인상을 확인한 장면이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나는 이것을 오타쿠 문화, 서브컬처가 남성젠더적 성격을 띤다, 남성중심적 문화의 특징을 갖는다 식의 단순 인상으로 귀결시킬 생각은 없다. 오히려 그날 오간 이야기를 통해 ‘오타쿠 문화가 가진 남성젠더적 문화의 이미지’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당시 일본의 오타쿠 문화로 대표되는 서브철처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잉여로 전락해간, 혹은 잉여되기를 통해 저항한 어떤 남성들의 해방구적 측면도 분명 갖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전통적으로 여성들보다 정서적 유대의 가능성과 조건이 척박했던 남성의 다른 식의 반/유대의 방식으로도 볼 수 있다는 것. 말하자면 이것은 임노동 중심의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을 통해 기득권을 확인할 수 있었던 남성들이, 노동에서 금융(자본)으로 중심성을 바꾼 신자유주의의 가속화 속에서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지위를 누릴 수 없게 된 상황과 연동되는 속성도 있음을 생각해보게 된 계기였다.

그런데 구라카즈 시게루가 지금 서브컬처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그것이 개인들의 표현, 창조이기 이전에 “자본의 욕동”에 휘둘리고 있다는 것, 그리고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생명[삶]”을 생산하는 감각과 거리가 멀다는 지점이다. (이에 반해 ‘스트리트적인 것’으로서의 서브컬처는 익명의, 다수의 신체적이고 정동적인 연결과 협력의 감수성으로 특징지워진다.- 모리 요시타카, 『스트리트의 사상』, 심정명 역, 그린비, 2013 참조) 심지어 그는 이것이 “비즈니스 사회의 스트레스를 완화시켜 주는 정신적 보조제로 전락”한 것임을 강하게 주장하는데, 이런 서브컬처 비판은 곧 유대나 소통의 가치를 부차적으로 여기는 예술, 문화에 대한 비판으로 읽을 때 의미가 있다. 즉, 각자의 우주로만 한없이 분리되고 고립되는 자기위안적 예술이나 문화는 이미 신자유주의 시대의 안티테제로서 기능하지 않는다. 이미 그 자체로 신자유주의 시대의 조건에 적합한 예술이 된 셈이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나’의 아이러니 – 국가에 흡수되어간 미적 아나키스트의 문제

이어 이 책에서 가장 문제적으로, 그리고 현재형으로 읽었던 부분(6장)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6장은 야스다 요주로(保田與重郎)를 통해 미적 아나키즘과 국수주의 미학 사이의 관계를 논하는 장이다. 이 책에 대한 리뷰어들(中島岳志, <「美的アナキズム」が問うもの>, 2011.11.27. http://book.asahi.com/reviews/reviewer/2011112700010.html / 고봉준, <‘피로·부품 사회’에서 예술은 어떻게 삶에 연루돼 있나>, 《프레시안》, 2015.4.10.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5360&ref=nav_search)이 공통적으로 관심을 보인 장이기도 하다. 왜 미적 아나키즘이 국수주의 미학으로 전위(轉位)되는지. 어떻게 ‘나’ 이외에 초월적 권위를 인정치 않는 미적 아나키스트가 민족이나 국가를 상위에 두는 국수주의자로 변모해 갔는지. 이 모순은 상당히 역사적인 문제이자, 양자의 내적 논리를 다시 묻게 하는 대목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선 강조해두고 싶은 것은, 저자는 미적 아나키즘이 국수주의 미학으로 흘러들어간 아이러니 자체에 주목했다기보다, 그런 아이러니를 확대, 과장해온 풍토를(특히 전후 일본 평론계) 겨냥했다는 점이다. 저자는 야스다 요주로의 행보 속에서 미적 아나키즘과 국수주의 미학이 결정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그 “거대한 틈새”를 밝히는데 주력했다고 말한다. 즉, 이 6장은 미적 아나키즘과 국수주의 미학의 차이를 부각하기 위한 장이라고 해도 좋다.

저자는, 야스다 요주로와 미적 아나키즘 사이의 공통점과 결정적 차이점을 상세히 밝힌다. 그리고 야스다 요주로가, 자기 창조의 주체가 사회와 역사를 구성해 간다는 모델을 유지하면서 그 주체의 자리를 개별적 예술가가 아닌 민족으로 이동시켰음을 확인한다. 이것을 오늘날의 맥락에서 거칠게나마 재독해하자면, ‘나’의 자리에 ‘나’의 바깥에 있는 강력한 대타자(야스다의 경우에는 ‘혈통’이었지만)를 가져와 바꿔치기 한 것의 문제로 생각해볼 수 있다.

사실 이런 것이라면 두 리뷰어의 문제제기는 정당하다. 사실 우리가 계속 궁금한 것은 여전히 미적 아나키즘과 국수주의 미학 사이의 차이점보다도 ‘그 둘이 어떻게 자리를 바꿀 수 있는지’ 쪽이기 때문이다. 즉, 현재형으로 문제를 치환해보자면 이런 것이 가능할 것이다. ‘왜 자유로워진 '나'들은 자주 ‘나 바깥의 대타자’(국가든 민족이든)를 상상하고 그것에 ‘나’의 자유를 양도하고 의탁하는가’.

저자의 말대로 ‘생’의 철학이나 아나키즘은 파시즘과 관련되어 지목될 때가 많았다. 생디칼리즘이 이탈리아 파시즘에 영향을 주거나, 러시아에서는 혁명적이었던 미래주의가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즘과 결합하거나, 극좌혁명주의자였던 소렐과 파시스트 무솔리니가 서로 밀월관계였던 것을 떠올려보자. 하지만 이것은 과거 역사 속 사례가 아니라, 현재 이곳의 어떤 문제들과 공명하는 것이기도 해서 더욱 질문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령 한국의 ‘일베’든 일본의 ‘재특회’든 서구의 새로운 인종주의나 배타주의든, 오랫동안 누적되고 근래 확연하게 수면 위로 떠오른 어떤 분위기에 대해 떠올려보고 싶다. 왜 다시 인종이나 민족이나 국가에 자신을 의탁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주장하며 타자혐오나 배외주의나 애국심을 합리화하는 사람이 많은지. 왜 피해자 편에 있어야 마땅할 이들이 같은 피해자를 조롱하거나 배척하고 힘센 가해자 편을 드는지. 또는 왜 많은 이들은 자기 이해관계와는 상관없는 기득권에 맹목적으로 표를 던지는지.

(여기에서 ‘일베’의 사례는 다소 다르게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일베로 지칭될 어떤 ‘문제’는, 한국 보수진영 전반의 정서와 사고를 극단적으로 함의하고 있고, 87년으로 상징되는 모멘트를 통해 제도적, 형식적으로나마 획득되고 합의된 어떤 가치들, 나아가 인간의 마지막 보루로서는 확인해야 두자고 인류가 합의한 가치들의 모든 역사와 절차를 무화시키려는 일종의 백래쉬(backlash)의 표출로 보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에서의 외국인 혐오, 새로운 인종/민족주의 등의 대두나, 또는 여전히 ‘나는 나 개인’이기보다도 ‘한국인’임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는 많은 이들의 심상도 복잡하게 얽혀 있는 문제로서 ‘일베’를 생각하고 싶다.)

나는 이 책의 6장에서, 미적 아나키즘과 파시즘 미학의 친연성을 주목하며 의혹을 갖고 보고 싶은 것이 결코 아니다. ‘나’의 ‘생명(삶)’ ‘생의 표현’ ‘생의 확충’이라는 것은 분명 어떤 조건도 제약도 없이 긍정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미적 아나키즘, 나아가 아나키즘의 기본 원리 자체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리고 이 ‘나’의 ‘생의 확충, 자유로움’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 모든 것의 근거, 토대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 책에서 자유로운 ‘나’들의 자발적인 어소시에이션, 낭만주의적 어소시에이션을 꿈꾼 이들이 특히 흥미로운 것도 그 이유다. 단지 ‘생의 표현’이 아니라 ‘생의 창조’에까지 연결되는 것이 미적 아나키즘의 원리이자 지향이라면, 낭만주의적 어소시에이션은 설령 늘 실패할 운명이라 할지라도 지금 이곳에서도 실험 가능한(그리고 현재에도 실험되고 있는) 의미있는 모델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편, 서두에 언급한 ‘나’들처럼 한없이 자유로워졌다고 믿었던 90년대 이후의 ‘나’들이 자신의 삶의 고충을 안겨준 주체에게 동화되거나 투사하여 오히려 나와 마찬가지의 약자/피해자들을 배척하거나 조롱하는 감각은 무엇일까. 야스다 요주로가 ‘나’라는 주체에 대해 찍었던 방점이 ‘혈통’(일본의 고도(古都) 나라(奈良)에 대한 애착에서 출발하여 태평양 전쟁의 주체가 되는 국가로 이동해간 과정을 포함하여)으로 이동하는 그 감각은 무엇이었을까.

매개를 부정하고 대표성에서 이탈한 ‘나’란 곧 자유로운 세계시민이 될 조건을 함의하고 있다. 그런데 이 자유로운 어떤 ‘나’들은 자꾸 더 센 가상의 무엇에게 투항해 간다. ‘국경 없는 세계’(하르투니언)처럼 여겨지고 민족, 인종, 국민 등의 신화도 깨어진지 오래건만, 다시 어떤 ‘나’들은 새로운 인종, 민족, 국민에 의탁하여 자기 정체성을 손쉽고 안전하게 보장받기를 원한다.

즉, 지금의 신자유주의적 조건은 개인에게 무한한 자유를 약속한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그 개인들은 더욱더 개별화되고 유대할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면서 ‘나’를 초월한 강하고 큰 무언가를 원하는 중인 것 같다. 서두에 언급한 소설 속 ‘나’들 중에는 지금도 여전히 방향을 알지 못해 불안한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상황을 자각하면서 더 불안해진 이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는 그 불안과 공포에 못이겨 손쉽게 ‘나’의 자유를 포기하고(그러나 포기인줄도 모른 채) 강력한 대타자를 찾아 헤매는 이도 있을 것이다.

개인의 생을 넘는 가치들(국가, 종교, 직장, 가족)이 더 이상 초월적으로 기능하지 않는 세계는 자기가 진정으로 자기 생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나’들은 그 속에서 의식·무의식적으로 자기 생의 주권을 양도할 또 다른 초월적 대상을 찾고 있는 셈이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세계를 더욱 강고한 시스템으로 만들어간다. 자유로운 ‘나’로 방출된 ‘나’들을 다시 시스템의 강화에 공모, 연루시키며 ‘공허한 나’로 환원시키는 통치술. 그리고 그 효과로서 다양하게 표출되고 있는 일종의 백래쉬들. 즉, ‘나’를 주체로 놓는다는 기획과 이 책에서 다룬 20세기 초 일본에서의 미적 아나키즘은, 지금 이곳의 만만치 않은 상황 속에서 ‘전략적으로’ 다시금 깊이 사유될 것이 요구된다.

‘나’를 초월하는 무언가에게 ‘나’를 양도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신자유주의의 통치술, 그 외부가 없어지는 듯 보이는 시대. 여기에서 ‘자유로운 나’들은 어떻게 나의 주체됨을 사수할 수 있을 것인가. 이 글은 그것에 대해 돌파할 무언가를 말할 수 있지 못하다. 하지만, 철옹성처럼 보이는, 그리고 이제껏 겪어온 어떤 시절보다 절망스럽게까지 느껴지는 이 시절의 어떤 강력한 반동·회귀의 장면들 앞에서, 그 공고함에 균열을 가할 사유와 말을 더 많이 발견·발명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확인해 두고 싶다.

『나 자신이고자 하는 충동』은 미적 아나키즘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거나, 문학·미학운동을 통해 세계 변혁이 가능하리라는 단순한 믿음을 설파하는 책이 아니다. 한국문학에서 한동안 골몰했던 ‘근대문학의 종언’ 담론과 관련하자면, 그 믿음은 ‘근대문학’의 믿음이었다. 지금 ‘근대문학’의 프로젝트는 사실상 재고되고 있다. 또한 오늘의 시절 역시 이제껏 겪어온 류와는 다르다.

‘자유로운 나’는 이 시대의 통치술이 작동하는 기초 단위다. 그러나 동시에, 그에 대한 거부와 저항의 가능성을 본래부터 품고 있는 구체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자유로운 나’의 해방과 창조의 기획은 더욱 강조되고 다시 사유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저자가 중요하게 언급한 ‘미적 경험’은 이 대목에서 이야기되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지면을 달리할 주제이다.)

서두에 언급한 소설들 속의 ‘나’로 다시 돌아가 본다. 정체모를 배후의 시스템과 미심쩍은 자유로움 속에서 곤혹을 겪었던 ‘나’들의 불안은 이제 명백해진 세계 속에서 어딘가로 이행해가고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은 ‘나’의 자유를 ‘나’보다 더 크고 센 무언가에게 양도하지 않을 용기, ‘나’를 초월하는 무언가를 상정하지 않고 ‘나’의 ‘생’을 창조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용기와 믿음을 지지해줄 ‘자유로운 나’들 간의 자발적인 연대와, 그런 삶의 창조가 필요하다.

일본 전후 비평계는 전전의 미적 아나키즘에서의 ‘나’를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지금 이 ‘나’의 기획, 전략은 전혀 관념적이거나 추상적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오히려 자유로운 ’나‘들을 시스템으로 복속, 공모시키는 이 시대의 통치술과 직접적으로 파이팅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장소다. 그러므로 우선 그 연대(유대)와 창조의 방법을 더 많이 상상하고 고안해야 한다. 구라카즈 시게루의 『나 자신이고자 하는 충동』을 지금 여기의 맥락에 놓고 싶은 것은 그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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