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호] '워크래프트' 중국 게이머는 어쩌다 북미의 밥이 됐나 | 오영진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2-26 09:32
조회
1905
'워크래프트' 중국 게이머는 어쩌다 북미의 밥이 됐나
『제국의 게임』 서평


오영진(문화평론가)


* 이 글은 2015년 5월 22일 인터넷신문 『프레시안』에 게재되었습니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6459


롤랑 바르트가 아직 살아 있다면 아마도 분명 컴퓨터 게임에 대해 책을 썼을 것이다. 그는 장난감과 놀이야말로 어른들의 이데올로기가 투명하게 반영된 매개체로 보았다. 대부분의 장난감은 어른들의 물건을 축소한 복사품들이다. 아이들은 병정놀이와 자동차경주를 하며, 그것의 의미가 채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몸을 예비하게 된다. 계급과 명령의 체계를 이해하고, 공격의 편집증과 방어의 노이로제를 체감하며, 기계장치의 위력적인 속도에 매혹된다. 그들은 놀이의 세계를 통해 진짜 세계를 알아버린다. 그러니 장난감과 놀이의 이면을 읽어내는 일은 현대 사회를 읽어내는 일도 되는 것이다.

닉 다이어-위데포드와 그릭 드 퓨터가 쓴 <제국의 게임>(갈무리, 2015년 5월 펴냄)은 오늘날 가장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놀이인 '컴퓨터 게임'(PC, 비디오 콘솔, 모바일 기기 등으로 제공되는 모든 종류의 디지털 게임을 '컴퓨터 게임'이라 부른다)의 이데올로기를 파헤친 작품이다. 컴퓨터 게임에 대한 계급적·이데올로기적 분석이라니 다소 생소하고 엉뚱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우리는 '컴퓨터 게임'이 유해한가 그렇지 않은가, 혹은 이로운가를 가지고 싸우고 있는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촌스럽다. '컴퓨터 게임'을 하나의 보편 명사로 싸잡아 취급하는 것은 물론이요, 개별 콘텐츠의 생산과 수용에 대한 제대로 된 분석이나 논평이 부재한 상황에서 막연한 혐오와 순진한 낙관만이 펼쳐지고 있다.

대체로 서구에서 게임학의 경로는 대략 비난->긍정->비평의 태도 변화를 거치며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학문적 발전의 궤를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세대론적 문제로 보아야 한다. 컴퓨터 게임이라는 이물을 처음 발견한 세대의 당혹감과 컴퓨터 게임의 가능성을 뒤늦게 알게 된 세대의 환호, 컴퓨터 게임이 독서와 같은 일상이 된 세대의 비판적 감성의 차이가 반영된 것이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제국의 게임> 같은 작업은 나올 때가 충분히 되어 나온 것이다.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 Altair 8800(앨테어 8800)은 1974년에 등장했다. 공저자 중 한 명인 그릭 드 퓨터가 1974년생이라는 점은 그래서 흥미롭다. 그는 컴퓨터 게임 키드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컴퓨터 게임에 대한 계급적·이데올로기적 분석

하위징아는 놀이는 현실에 대한 모방을 넘어 재생산 활동이라고 말한 바 있다. 예를 들어 체스 게임은 전쟁의 모방이고, 이를 위험하지 않게 축소해 전쟁의 공포 대신 재미를 안겨준다. 하지만 체스 게임 행위는 동시에 전쟁을 이끄는 정동(情動)을 예비하게 하며, 이를 증폭하는 역할도 한다. 다른 예를 들자면, 수많은 축제 의례는 단지 감정 에너지를 소비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끌어모아 사실상 하나의 열망으로 바꿔내는 커다란 놀이 장치로 기능한다. 하지만 하위징아는 이러한 재생산이 언제나 지배 체제의 이익에 복무한다는 것은 간파하지 못했다. 위데포드는 이런 하위징아를 비판한다. 이런 점에서 하위징아적 '재생산' 개념에 알튀세르적 '재생산' 개념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지배 담론의 표상 체계는 물리적 노동 조건의 재생산뿐 아니라 노동력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복종과 실행을 재생산한다. 이러한 재생산 구조를 파악하는 일이야말로 이데올로기를 폭로하는 일이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컴퓨터 게임을 분석한 작업의 결과물이 이 책의 4장 '일상화된 전쟁 : 풀 스펙트럼 워리어'이다. 본래 신병 교육이나 모병을 위한 유인책으로 게임을 활용하려던 미국 국방부는 '크리에이티브 테크놀로지 연구소'를 1999년에 설립하여, "미래의 임무를 위해 군대가 훈련하고 사전 연습을 하는 방법에 혁명을 일으키고"(245쪽)자 했다. 그들이 고용한 사람들은 게임 회사와 영화사의 시각 디자이너, 시나리오 작가, 특수 효과 설계자들이다. 그들은 시뮬레이션을 하나의 놀이적 형식으로 전환하여 누구나 쉽게 이 전쟁 시뮬레이션에 접속하기 쉽게 만들었다.

폴 비릴리오가 <전쟁과 영화>(한나래, 2004)를 통해 영화가 군사 무기가 되는 순간을 포착했다면, 위데포드는 게임이 군사 문기가 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판데믹 스튜디오가 2004년 XBOX로 출시한 게임 '풀 스펙트럼 워리어'는 이런 군사 시뮬레이션의 상용 오락판이라고 할 수 있다. 그전까지의 군사 시뮬레이션이 사실상 단순한 총싸움 놀이에 밀리터리 코스튬을 얹은 것이라면, 이 게임은 실제의 이라크전 같은 도시 게릴라전을 시뮬레이팅한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가진다. 게이머는 게임 체험을 통해 새로운 전쟁의 특성을 예비하고 학습한다. 게임 속 주인공 캐릭터들은 제각기 다른 피부색의 이민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하나의 미국을 위해 숭고한 희생을 감내하는 영웅들이다. 그들이 등장하는 신(scene)에서는 게임의 작동과는 무관하게 캐릭터의 출신 성분과 관련된 백그라운드 스토리가 컷 신으로 삽입된다. 게임 속 분대는 "과도하게 대표화된 소수들과 부유층, 그리고 근본적으로 배제된 최하층"(256쪽) 등으로 계급적 성분이 균형감 있게 구성되어 있다. 게임 속 작전을 수행하는 분대원들은 이 점에서 작은 미국이다.

<파리 마치> 표지에 실린, 경례하는 흑인 병사의 사진이 야기하는 이데올로기적 포획을 읽어낼 수 있다면(롤랑 바르트) '풀 스펙트럼 워리어' 속에서 미국의 신화를 읽어내는 것도 어렵지 않다. 반면 아무런 인격도 부여받지 못한 도시전의 게릴라들은 민간인 복장을 하고는 언제 공격할지 모르는 잠재적인 위협으로 묘사된다. 당연히 그들에겐 내러티브가 없다. 그 묘사 수준조차도 무수히 복사하기 쉽게 디자인된 단순한 오브젝트(object)에 불과할 뿐이다. 세이브와 로드를 통해 언제나 이길 수밖에 없게 만든 게임이라는 형식은 전쟁에서 피 냄새를 지워버리고 승리의 감정만을 안겨준다.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게임적 주체가 국가 이데올로기에 포획당하는 순간이다. 이 점에서 게임 '풀 스펙트럼 워리어'는 전쟁을 왜곡할 뿐 아니라, 특정한 정동만을 재생산하는 방식으로 게이머를 전쟁 기계로 만들고 있다.

MMORPG와 비물질노동의 재생산

이 책이 논하는 '재생산'은 이데올로기의 재생산일 뿐 아니라 착취하기 쉽게 가공된 비물질 노동의 '재생산'을 뜻하기도 한다. 이는 주로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작동하는 MMORPG(Massively multiplayer online role-playing game)에서 자주 발견되는 현상이다. 예를 들어 '울티마 온라인'의 한 유저는 게임 속 특정 아바타로 분해 역할 놀이를 수행한다. 그는 게임 활동의 하나로서 초보 유저에게 게임 속 시스템을 이해시키고 그들의 모험을 돕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질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하고 있는 것은 놀이일까, 노동일까?' 게임 시스템을 소개하고 이해시키는 것은 본래 게임 퍼블리셔의 역할이며, 그들이 NPC(Non-Player Character)의 인공지능 강화와 시나리오 개선을 통해 해결했어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그러한 일을 대신 수행한 유저는 그것이 놀이의 일부라는 점에서 노동자로서 취급받지 못한다. 게임 퍼블리셔는 이러한 시스템을 방치하거나 특정 행동을 유도하여 그들의 노동력을 무단으로 흡수해 버린다. 이 점에서 위데포드는 '놀이 노동자'(Playbor)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네그리 하트가 <제국>에서 논한 비물질노동이 삶 자체를 착취하는 방식으로 드러난다고 했을 때, 그것은 바로 게이머-노동자, 놀이 노동자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닐까라고 이 책은 질문한다.

앞의 게임들 말고도 <제국의 게임>은 록스타의 게임 'GTA'의 공간적 의미를 신자유주의의 장소성의 문제로 풀어낸다. 'GTA'의 내용은 무정부적인 폭력과 범죄와 유착된 정치에 대한 풍자로 읽히지만, 진짜 의미는 그들이 활동하고 있는 '도시'라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플레이어의 유혈이 낭자한 액션이 매끈하게 허용되는 이 도시들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외곽 너머로는 나갈 수 없게 만든다. 모든 자유를 허용하지만 자본주의 밖으로 나갈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 현실을 담아내고 있는 것 아닐까? 또한 블리자드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서 통치의 문제와 식민주의의 확대를 경계하고 있다. 중국 게이머들은 게임 속 아이템과 화폐에만 관심을 갖고, 게임의 밸런스를 위협하는 수준으로까지 과도한 게임 노동을 수행한다. 그들은 이른바 골드 노동자로 불린다. 이러한 골드 노동자는 북미 게이머들에게는 학대와 살해가 용인되는 '아시아적 신체'로 취급된다.

이렇게 위데포드는 컴퓨터 게임이 제국의 훈련장, 아니 제국 그 자체가 되어가고 있음을 개별 게임에 대한 구체적 분석 및 이를 기존 사회과학의 개념으로 전환하는 것을 통해 증명하고 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가상 게임(컴퓨터 게임)은 이겨야 할, 얻어야 할 세계와 함께 있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주장한다.(469쪽) 우리의 투쟁은 현실에서도, 가상현실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컴퓨터 게임으로 대표되는 가상 세계가 지금 위험하다는 경고음을 내고 있다. 비물질 노동의 손쉬운 착취와 지배 이데올로기의 재생산 음모로부터 재빨리 이곳을 사수하는 것이 시급하다. 이것만으로도 <제국의 게임>은 충분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제국의 게임, 다중의 게임

다만 이 책의 아쉬운 점을 말해보자면, 책 제목이 <제국의 게임>이 아니라 실은 <제국의 게임, 다중의 게임>이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들도 네그리 하트의 <제국>과 <다중>의 컴퓨터 게임 버전을 쓰고 싶었다고 진술하고 있다. 물론 그것을 3부에서 논하고 있긴 하지만, 논의 분량으로는 전체의 5분의 1이 채 안 된다. 작은 가능성을 놓치지 않는 낙관적 태도는 장려되어야 하지만, 그들이 사례로 내세운 전술적 게임들은 그 종의 빈약함과 퍼포먼스적인 공허함에서 벗어나 있지 못하다. 소위 독립 제작 문화의 맥락에서 벗어나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더 실천적이고 강력한 실험들이 발굴되어야 한다. 필자는 이 부분을 보완해 줄 책으로 <억압받은 자들을 위한 비디오 게임>(곤살로 프라스카, 커뮤니케이션북스, 2008)과 <누구나 게임을 한다>(제인 맥고니걸, 알에이치코리아, 2012)를 같이 읽기를 권하고 싶다.

덧붙여 마지막으로 출판사에 당부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앞으로도 만약 게임과 사회 이론에 관한 책이 계속 출간된다면 반드시 게이머에게 감수를 맡겼으면 좋겠다. 머시니마(Machinima)는 부연 설명이 없으면 그 중요성을 금방 알아차리지 못하는 새로운 미디어 현상이고, 리얼한 게이머들은 'GTA'(Grand Theft Auto)를 '그랜드 테프트 오토'라고 부르지 않으며, '헤일로'(Halo)를 할로로 발음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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