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호] 자본과 언어, 그 공모를 횡단하기 | 엄진희(다중지성의 정원 회원)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2-23 09:46
조회
1594
자본과 언어, 그 공모를 횡단하기
-크리스티안 마라찌의 『자본과 언어』를 읽고

엄진희(다중지성의 정원 회원)


자본과 언어는 어떻게 연관되어 있을까. 이 둘이 연관이 있다면 어떤 하나의 매트릭스를 공유하고 있다면 사실 우울하다. 언어 없이 사는 게 불가능하다면 자본 없이 사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니까. 정말 자본주의는 스스로의 모순 때문에 무너지게 될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건, 자본은 스스로 자신의 위기를 치유까지 할 수 있다는 건 우리도 이미 알고 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현실 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우리 세대는 자본주의와는 다른 세계가 있다는 상상력마저 상실했다. 젊은이들은 알아서 자본주의에 질문하지 않고 비정규직에서도 스펙 경쟁 속에서도 군말 없이 잘도 견뎌낸다. 질문하라고 가르치지 않아서일까. 그래,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불온하니 어울리지 말라는 소리를 들어온 것도 사실이다. 질문을 한 것 뿐인데 친구들에게 빨갱이라는 별칭을 얻고 살기도 한다. 물론 이 세상을 한번에 전복하겠어라는 생각은 청소년적 상상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바울적이든 바디우적이든 지젝적이든 간에 보편주의를 믿는다. 그게 진리일거라고.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세금만 천몇억이 되는 사람이 있고 핸드폰 요금 몇만원이 없는 사람이 있어서 되겠는가. 맹자 같으면 자신의 백성을 돌보지 않고 이렇게 정치를 하는 자는 빼앗지 않고는 만족하지 못하는 자라며 나무랐을 것이다.

도대체 자본이란 무엇일까. 이런 질문은 잘못된 것일 수 있다. 자본 내부의 균열을 말하지는 못하니까 말이다. 균열이 나 있고 틈이 나 있는 것을 무엇이라고 정의하기는 어렵다. 마라찌는 지금의 자본주의(금융)가 이전과는 다른 매커니즘에 의해 운영된다고 보고 있다. 마이클 하트도 서문에서 밝혔지만 그는 포스트포드주의의 신경제는 ‘더 이상 공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포드주의적 임금 관계들이 더 이상 사회적 재생산의 보증으로 작용하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경제는 무엇으로 운영되는가. 바로 언어이다. 즉, ‘금융의 세계는 언어적 관습들을 특징으로 하며 그것들을 통해 작동’한다는 것이다. 또 ‘지배적인 새로운 노동 형태들은 언어를 통해, 언어적 수행과 유사한 수단들을 통해 생산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이클 하트는 ‘공장 노동이 여러 면에서 침묵의 노동이라면 포스트포드주의의 공장 바깥의 노동은 수다스럽다’고 말한다. ‘서비스 업종, 미디어, 건강, 교육 등의 모든 경제 부문들에서 노동은 언어적 역량에 의해 특징지어진다는 것’이다. 이제 자본주의는 언어까지 침식하여 언어를 자본주의적으로 재구조화하고 재구성하는 듯 보인다. 결국 우리의 삶을 자본주의적으로 만든다는 얘기다. 이제 우리에겐 언론의 자유도 민주주의도 차단된 듯하다. 모든 것이 자본주의적 언어로 둘러싸여 있으니 말이다. 다른 언어를 만들어야 할텐데 그건 문학이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책을 읽지 못하게 하는 사회적 만성적 폭력에서 문학을 읽지 않는다. 자본주의적 언어를 횡단하는 게 있다면 그것은 문학의 언어일텐데 시나 소설은 유용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담론 또한 금융 자본주의의 신경제가 생산해낸 담론일 것이다. 유용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다시 맹자에게 돌아가게 된다. 맹자에게는 유용함이나 이익이 오히려 쓸모없는 것이다. 오직 仁과 義로움만 있을 뿐이다. 애써 이렇게 말해야 누가 귀를 기울여 줄까 싶지만 우리는 이런 담론들을 계속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자본은 이런 담론들까지, 즉 인문학 분야도 산업화 한지 오래다. 사람들은 맹자 강의를 듣고 백화점 명품관에 갈지 모른다. 마라찌는 여전히 프롤레타리아의 벌거벗은 삶에 대해 말하지만 프롤레타리아라고 부르든 프레카리아트라고 부르든 내주변에 직딩들(비정규 포함)은 자신이 노동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들은 언제나 돈이 좀 모이면 마음껏, 쇼핑도 할 수 있고 나름대로 여가(고급)도 즐길 수 있다. 큰 불만은 없어 보인다. 무산자여서 고통 받는 시대는 얼추 벗어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내 주변 친구들도 일을 하긴 하지만 점점 더 가난해진다며 아르바이트로 연명하는 내가 더 여유 있어 보인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도 너는 책이라도 보고 살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래 그럴지도, 그들은 항상 뭔가가 허전한 모양이다. 그 뭔가는 도대체 뭘까. 미국에서 실험을 했다고 한다. 책상에서 손수건을 떨어뜨리고 그걸 줍는 일을 하루 8시간 두달인가 세달을 하면 예를 들어 천만원을 준다, 물론 이 실험을 완수한 참가자는 없었다. 인간은 돈을 주면 뭐든 다 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금융자본주의는 물론 이렇게 미련하게 인간을 노동시키지 않는다. 언어를 통해 우회적으로 우리의 모든 삶을 자본주의적으로 구축한 뒤에 스스로 참여하도록 한다. 미래의 불안을 담보로 우리는 보험에 들고 신용으로 대출도 받을 수 있으며 주식 시장은 풍문으로 돌아간다. 어느 지역의 땅값이 오를 것이다 라는 언어적 차원은 곧바로 수행적 차원으로 연결되고, 사람들은 그것이 정확한 정보인지 검토하기 보단 집단적, 관습적으로 거의 반사적으로 그곳에 집중 투자한다. 마치 공연장에서 앞사람이 일어서면 뒤는 다 같이 일어서야 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집단 심리, 군중 심리에 기생하는 게 금융 자본주의의 생리인 것 같기도 하다. 전쟁이 날 거라는 여론만 조성되면 모든 물품은 동이 날 것이다. 오늘 우리 세계는 여론을 조작하기도 쉬운 것 같다. 언론 매체가 그만큼 발달했으니 말이다. 모든 문제는 누가 여론을 만들고 자본주의적 담론을 만들어내는지 일 것이다. 결국 지배층의 조작일까. 대중은 그 지배에 휘둘리고. 아님 대중이 스스로 그런 담론들을 만들고 실행하는 것일까. 둘다 일 것이다. 그래서 문제는 복잡해진다. 이제 적이 안보이기 때문이다. ‘적’이 보일 때는 어쩌면 행복했을지 모르겠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까.

우리는 쇼핑할 때 물건을 사는 게 아니라 브랜드를 사고 이미지, 로고를 산다. 로고에 대항하고 반대하는 것이 능사일까. 오히려 인간의 이러한 성향을 극단으로 밀고가보면 어떨까. 우리는 선물을 살 때 그 사람이 좋아할 모습을 상상하기도 하며 선물을 고르면서 더 즐거워하기도 한다. 자본이 이러한 인간의 감수성까지 이용할 때 그 잉여, 자본이 더 이상 포착할 수 없는 그것을 극대화 시켜서 자본주의 매커니즘을 무력화시키는 것이 가능할까. 여러 대안들이 있을 것이다. 대안 학교도 있고 대안 공동체도 있으며 등등. 그런데도 자꾸 세계는 거꾸로 가는 것만 같다. 복지 국가는 계급성을 부인하고 사회적 적대를 묵인하면서 등장했고 우리는 그러한 세계(개인만 남은)에서 나고 자라서 사회적 적대를 체감하지 못한다. 돈이 없어서 배우지 못하거나 쌀이 없어서 밥을 못먹지는 않으니 말이다. 극단적인 개인화 시대에 우리가 자본과 언어의 공모를 횡단하기 위해서는 특이한 개인들이 되는 길 밖에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춤추는 개인, 노래하는 개인, 시 쓰는 개인... 그리고 이런 개인들이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고 수행하면서 한걸음씩 따로 또 같이 걷는 거리 만들기. 이 거리는 자본의 외부에 있지 않다. 자본이 만들어낸 균열, 틈에서 생긴 거리일 것이다. 자본주의 외부에서 자본주의를 전복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 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기, 바틀비식이든, 장 뤽 낭시가 말한 無爲(비-행동)의 공동체식이건 말이다. 낭시는 수동성, 내버려둠을 강조하면서 자본주의적 교환질서와 신자유주의의 가치화에 대항하여 ‘비등가적인 것’의 공동체를 구상한다. 이러한 공동체에서 생성되는 언어는 금융 자본의 신경제적 언어와 근본적으로 다르게 유통, 소통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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