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호] 31조원 날리고 파산한 폐허, 서울의 맨살! | 임태훈(미디어 연구자·문학평론가)

이 책을 주목한다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2-23 10:16
조회
7363
31조원 날리고 파산한 폐허, 서울의 맨살!

임태훈(미디어 연구자·문학평론가)


* 이 글은 인터넷신문 『프레시안』 2013년 6월 7일자에 실린 글입니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30607111847


<공간의 생산(La Production De L'espace)>(양영란 옮김, 에코리브르 펴냄)을 완성하기 전인 1966년에서 1973년 사이,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 1901~1991)는 여러 도시를 옮겨 다니며 도시 문제에 관한 사유에 몰두했다. 이 시기 그가 방문한 도시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아테네, 테헤란, 오타와, 교토, 뉴욕, 몬트리올, 위트레흐트, 바르샤바, 뉴욕, 브뤼셀, 오르후스(덴마크), 오랑(캐나다), 런던. 이밖에도 베네수엘라, 페루, 브라질을 방문했다. <공간의 생산>의 초판은 1974년에 출판되었는데, 이 책의 3장인 '공간 건축술'의 3절 10화에서 르페브르는 '리듬 분석'에 대한 구상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리듬에 관한 르페브르의 관심은 일상생활의 구조와 질서를 이해하려는 노력과 연관되어 있다. 노동, 생산, 소비, 사회화와 같은 주요 활동 영역에서 인간 삶의 구조화와 조직화를 촉진하는 것이 무엇인지 해명하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리듬 분석'에 대한 최초의 단상은 1962년 <일상생활 비판> 2권에서 언급되었고, 1968년 발표한 <한 연구의 소개>라는 텍스트에서 다시 한 번 상기된 바 있다. 특히 <한 연구의 소개>를 발표했을 무렵 그는 한국에서 가까운 일본에 장기 체류하고 있었다.

노교수의 출장 리스트를 훑어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그가 서울에서 머물며 1972년 10월 17일의 비상계엄령과 유신 체제 선포를 목격할 수 있었다면, 이 체험은 도시에 관한 오랜 탐구에 어떻게 반영되었을까. 르페브르에게 만에 하나 방한 계획이 있었다고 해도, 프랑스 공산당원이었으며 1958년 탈당 이후에도 일평생 좌파적 비판의 편에 섰던 경력을 문제 삼아 당국이 입국허가를 내줬을 것 같진 않다. '리듬 분석'에 대한 그의 구상은 1981년 발표한 <일상생활 비판> 3권에서 또 다시 이야기된다. 이 무렵의 한국도 그가 반드시 와봤어야 할 장소였다. 특히 1982년 1월 6일 자정을 전후로 통금(通禁)이 철폐되었던 일은 '리듬 분석'의 과제로 치면 금맥이나 마찬가지였다.

세계 최장 기간인 36년간 통금에 묶여 있던 사회에 새로운 일상의 리듬이 구조 변동했던 시점이었다. 중고생의 교복, 두발 자율화 조치도 이 시기에 단행됐다. 36년간이라는 시간은 묘하게도 일제 통치 기간과 맞먹지만, 잃어버린 밤을 되돌려 받았다고 해서 '해방'의 감격까지 떠올릴 형편은 아니었다. 세대교체 된 쿠데타 정권이 '정의사회 구현'을 외치던 시기였다. 그들의 사회에선 1972년 유신 헌법과 함께 상실한 국민의 기본권 회복은 '정의'의 문제가 아니었다. 빼앗긴 권리를 되돌려 받기 위한 1987년 광장의 투쟁도 한국 사회의 '리듬 분석'을 위한 빼놓을 수 없는 과제다.

1982년이면 르페브르의 나이가 여든이 넘었을 때다. 생애 말년의 프랑스 노인에게 한국행을 기대하기란 어려웠을 시기다. 그럼에도 이런 상상을 자꾸 떠올려보는 까닭은, 그의 책이 발표되었던 그 해, 동시대 한국과 한국인의 삶이 책의 내용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적 삶의 퇴화가 정당화되는 도시의 증식과 복제는 전 세계 공통의 현상이고, 서울은 그 적나라한 전형이었다. 그러니 위대한 사상가의 책이 우리 독자에게 뒤늦게 도착했음을 아쉬워하기보다는, 우리가 사는 도시의 파국이 수십 년 전 책에서 진단했던 내용과 다르지 않은 이유를 더 아파해야 한다.

<공간의 생산>은 2011년에서야 한국판이 완역되었고, <일상생활 비판> 전작은 언제쯤 완역될 수 있을지 까마득하다. 르페브르 사후인 1992년에 프랑스에서 출간된 <리듬 분석>(정기헌 옮김, 갈무리 펴냄)은 <공간의 생산>에 비교하면 놀랍도록 빨리 한국에 도착한 셈이다. 참고로 <리듬 분석>의 미국판은 2004년에 나왔다.

<리듬 분석>의 한 페이지는 31조 원을 허공에 날리고 파산한 용산 개발 사업에 대한 논평처럼 읽혔다. 이 책에는 '자본'의 속성을 분석한 예리한 문장이 곳곳에 벼려있다.

"자본은 사회적 부를 파괴한다. 자본은 '사적인' 부를 생산한다. 사실은 공적인 괴물에 불과한데도 '사적인' 개인을 내세우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본의 국가와 국가기구를 복종시킬 정도까지 정치적 투쟁을 확장시킨다. (공공) 정원과 공원들, 광장과 대로, 공개된 기념물 등을 포함하는 사회적 부는 지난 시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이 분야에 대한 투자는 민주주의적 압력에 의존하기도 하지만 매우 드물게 이루어진다. 그보다는 어떤 종류의 상품도 수용 가능한 빈 틀, 기착과 통과를 위한 장소, 군중들이 서로 마주치는 장소가 창출된다. (예 : 보부르의 퐁피두 센터, 파리 포럼, 뉴욕 무역센터). 사라질 위기에 처한 건축과 건축가는 이제 돈줄을 쥔 '개발업자'들에게 굴복한다." (164쪽)

자본의 리듬에 휩쓸려 다니는 서울의 일상에서 사회적 부의 파괴는 임계점을 넘어선 지 오래다. 우리 몸의 리듬도 도시와 함께 변하고 있다. 자본은 우리 시대의 몸을 비추는 거울이다. 고속도로 변에 아파트 단지와 이마트밖에 없는 황량한 주거지에서 돈의 흐름은 시계 단자만큼이나 뻔한 움직임을 반복한다. 사람들의 생활 방식도 돈을 따라 단조로워진다. 비슷비슷한 풍경의 이런 장소가 고속도로를 따라 수백 개씩 늘어서 있는 세계가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이다. 이런 일상 세계의 리듬 분석이 과연 어려운 일일까?

시험을 준비하고 시험을 치르고 평가 결과에 따라 등급을 결정 받는 수험생의 일상이 일평생으로 확장된 사회에선 만인이 죄수이자 간수이길 자처한다. 이들 수험생 주체에게 삶은 경영의 대상이며, 감정이나 욕망은 합리적으로 통제되지 않으면 경쟁력을 해칠 수 있는 리스크로 간주된다. 르페브르의 용어를 빌리자면, 우리는 조련(dressage) 당하고 있다. 돈 잘 버는 능력, 즉 경쟁력으로 환원될 수 있는 능력의 유무를 일평생 추궁당하는 경제동물들의 수용소로 우리 시대의 도시는 전락하고 있다. 폐허로 남은 용산 재개발 지구의 풍경은 서울의 비참한 실체를 정직하게 드러내고 있다. <리듬 분석>에서 그리는 리듬 분석가의 초상도 우리 시대의 폐허를 마주하고 있는 이의 얼굴에 겹쳐 읽어야 한다.

르페브르가 오랜 세월 구상한 '리듬 분석'이지만 그 최종적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는 <리듬 분석>은 유감스럽게도 미완성 상태다. 이 책에는 '리듬 분석'의 구상과 의도를 파악할 대략적인 설계도는 전개되어 있지만, 사회적 공간에서 표출되는 리듬이 실제로 무엇인지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다. 이 때문에 사회적 시공간에 적용할 리듬 분석의 이론 틀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회의하는 비판자들도 있다.

르페브르의 '리듬'은 그의 바람처럼 실천 속에 진입할 수 있을까?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1968, 한국어판 김상환 옮김, 민음사 펴냄, 2004)에서부터 언급했고,<천 개의 고원>(1980 펠릭스 가타리 공저, 한국어판 김재인 옮김, 새물결 펴냄, 2001)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분석하고 전개했던 '리토르넬로 ritournelle' 개념을 르페브로의 '리듬 분석'에 비교해볼 수 있다. 들뢰즈의 '리토르넬로'는 영토화와 탈영토화에 관련된 것, 특히 시간의 선천적인 형식으로 시간을 주조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문제는 이 개념이 지나치게 폭넓은 의미로 적용될 수 있다 보니, 비유하자면, 방망이를 짧게 잡고 때려야 할 구체적인 프레임에 들고 들어오면 설득력 있게 쓰이기 어렵다. <천 개의 고원> 이후의 작업에서 '리토르넬로'가 비중 있게 다뤄지지 못한 까닭도 이 때문이다. '리토르넬로'가 '르페브르 리듬 분석'의 나쁜 미래는 아닐까? '리듬 분석'을 공중전이 아니라 세속의 백병전에 최적화된 괴물로 변신시켜야 한다. 이 괴물은 여러 유용한 개념들이 뒤섞인 키메라(chimera)와 같은 것으로 구성되어야 하지 않을까?

<리듬 분석>은 죽음을 눈앞에 둔 대가가 후학들에게 자신의 아이디어를 물려주기 위해 정리한 연구 노트에 더 가깝다. 김현이 작고하기 전 3년 동안 쓴 일기를 모은 <행복한 책 읽기>(문학과지성사 펴냄, 1992)를 <리듬 분석>과 종횡으로 읽고 싶어진 까닭도 대가의 문장에서 느껴지는 애달픈 열정이 기시감을 느끼게 했기 때문이었다. 글쓰기의 성격이나 내용은 확연히 다르지만, 죽음에 기회를 뺏기기 전, 그들은 할 수 있는 데까지 아이디어를 글로 옮겼다. <리듬 분석>의 3장 '창문에서 바라본 광경'의 한 구절에선 두 사람의 목소리가 교차하는 듯했다. 늙고 병들어 쇠약해진 몸이지만 그렇기에 더욱 강렬히 이야기할 수 있게 된 주제에 확신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소리와 소음들을 듣는 것을 멈추고 대신 우리 자신의 몸(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에 귀를 기울인다면, 우리는 리듬들도, 그 리듬들의 조합도 파악하지(듣지) 못한다. 그것들이 우리의 몸을 구성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오직 고통 속에서만 특정 리듬은 병에 의해 변형되어 돌출된다. 리듬 분석은 평상시의 부정리듬성보다 병리학에 더 접근한다. 리듬들을 파악하고 분석하기 위해서는 그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지만 완전히 벗어나면 안 된다. 이는 병(病) 혹은 기술(技術)을 통해 가능하다." (106쪽)

인간 신체는 온갖 리듬의 다발로 구성되어 있다. 열린 창 앞에 선 대가의 몸도 외부의 리듬을 감지하는 메트로놈으로 기능한다.

르페브르의 리듬 분석 이론은 장소의 시공간적 특수성을 확인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아울러 리듬 운동과 행동의 반복, 단선적 리듬과 순환적 리듬의 특별한 얽힘, 리듬의 성장과 쇠퇴 단계를 확인할 수 있다고 본다. 조화리듬성(eurythmie), 동일리듬성(isorythmie), 리듬이 해체되고 결국 모든 리듬이 동시화된 부정리듬성(a-rythmie) 나아가 다양한 리듬으로 구성된 다리듬성(polyrythmie)의 총화에 따라서 리듬 운동은 쉼 없이 변화한다.

르페브르는 순환과 직선이라는 두 형식의 시간성이 가지는 차이에 주목한다. 순환적 리듬은 자연의 주기적 운동이 대표적이다. 지리와 기후 현상, 생물학적 성장, 죽음과 재탄생 등등. 직선 운동은 동등하거나 규칙적 간격에 거의 근접한 동일 현상이 일정한 순서로 연속되거나 재생산되는 것이다. 이 경우는 프레스 기계의 반복적인 움직임, 컨베이어 벨트 생산 작업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순환적 시간성과 직선적 시간성은 뚜렷하게 구분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순환과 직선은 상호작용 관계이며 쌍방의 척도로 작용한다.

<리듬 분석>의 핵심적인 내용은 이 모든 리듬이 다중성(plurality)을 이루며, 다중적인 리듬이 하나의 앙상블(ensemble)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사회적 삶이란 결국 '나'의 리듬을 '타자'의 리듬에 투입하는 투쟁이며, 리듬을 둘러싼 투쟁은 동질성으로 나아가려는 경향과 다양성으로 나아가려는 경향 사이의 갈등이다.

르페브르의 '리듬 분석'은 새로운 연구 방법론의 시초일 수도 있지만, 오랜 전통과 성과가 누적된 '시간'에 관한 연구의 한 갈래이기도 하다. 르페브르의 '리듬'은 여타의 시간론(時間論)에 어떻게 응용되고 새롭게 갱신될 수 있을까? 이를테면 폴 비릴리오가 전 세계 정보교환의 메타시티를 다스리는 '실시간의 전제정치'를 문제 삼으며 개념화했던 '시간정치(chronopolitics)'를 르페브르의 '리듬'에서 어떻게 응용할 수 있을까? 문화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의 폴리크로닉(polychronic)한 시간(P-타임)과 모노크로닉(monocronic)한 시간(M-타임)의 분류를 참고하면 르페브르의 순환과 직선, 다중성과 앙상블 개념이 보완될 수 있지 않을까? 축음기의 등장을 예로 들어 시간의 비가역성을 거슬러 시간축을 조작하는 것이 기술로 가능해졌다는 프리드리히 키틀러의 논의를 르페브르는 리듬 분석의 입장에서 뭐라고 논평할까? 네트워크 사회에서 공간적 이동에 따르는 시간적 간격이 점점 극소화되는 경향을 가리켜 마뉴엘 카스텔은 '초시간적 시간(Timeless time)'이라고 정의했다. 이 또한 날로 가속화되고 있는 미디어 발달 과정의 극한을 쫓는 리듬 분석의 한 방법이 아닐까? 그리고 한국의 장시간 노동체제를 극복하는 데 필요한 '리듬 분석'은 어떤 방법론과 전제가 보완되어야 할까?

<리듬 분석> 4장 '조련'과 관련해선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우선 이런 사례를 참고했다. 근대적 신체의 교정과 관련해 메이지 일본에 흥미로운 기획이 있었다. 바쿠후 말기 농민들을 근대적이고 서양적인 군대의 병사로 만드는 데 걸음걸이에서부터 큰 어려움이 있었다. 예를 들어 이 시기 징병된 병사들은 군대의 행진에서 대열을 지어 행진하는 것을 무척 어려워했다. '난바 걸음걸이(ナンバ走り)' 때문이었다. '난바'란, 오른손과 오른발이 동시에 나오는 걸음걸이다. 요즘이야 코미디 프로그램의 몸개그 소재이지만, 농경 문화에서는 합리적인 신체 동작이자 기법이었다. 대지를 향해 이뤄지는 노동, 특히 힘을 잔뜩 주어야 하는 작업을 할 때의 동작을 떠올려보면 신체가 비스듬한 자세가 되어야 수월하다. 하지만 '난바'는 근대적인 공업 생산과 군사 행동 및 집단행동에선 교정되어야 할 신체였다. '난바'에선 근대의 리듬이 제대로 작동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보자본주의와 네트워크 사회의 극한에서 사는 우리에게도 '난바'를 교정하는 것과 같은 리듬의 '조련'이 이뤄지고 있지 않을까? 스마트폰을 비롯해 모바일 미디어 컬처에서 문제적인 사례를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리듬 분석>은 질문을 불러일으키는 책이다. 이 책은 그 모든 질문에 대한 해결책이 담긴 매뉴얼이 아니라 새로운 논쟁과 구호로 뒤엉킨 소음을 일으키는 책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꼭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부디 도착해야 할 곳에 제때 닿는 리듬일 수 있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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