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호] 『건축과 객체』에 대하여 / 그레이엄 하먼 『건축과 객체』 한국어판 출간 기념 강연 원고

강연
작성자
ludante
작성일
2023-08-19 16:40
조회
702
 

『건축과 객체』에 대하여


『건축과 객체』 한국어판 출간 기념 강연 원고


그레이엄 하먼


번역 : 김효진 (『건축과 객체』 옮긴이)


강연 일시 : 2023년 8월 19일 토요일 오후 1시 ZOOM


건축학교에서 행해진 나의 첫 번째 강연은 2007년 4월 런던의 건축협회 건축학교에서였습니다. 그 당시에 그것은 하나의 고립된 사건이 될 것처럼 느껴졌으며, 그 후 여러 해 동안 나는 건축가들로부터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을 더 받지 못했습니다. 2011년 가을에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해 9월 동안 나는 뉴욕의 여러 장소에서 다수의 강의를 해달라고 초청받았습니다. 이들 강연 중 어느 것도 건축과 관련되어 있지 않았지만 나의 오래전 대학 급우인 데이비드 루이가 여러 강연에 참석했습니다. 그는 건축가였을 뿐만 아니라, 머지않아 건축가들 사이에서 객체지향 철학에 관한 말을 퍼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2016년에 나는 로스앤젤레스 소재 남가주 건축대학교(일반적으로 SCI-Arc로 알려져 있습니다)에 고용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하고 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데이비드 루이는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그는 뉴욕에서 성장했고 나에게 자신의 한국어 구사 능력이 대략 5세 수준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의 직계 가족을 제외하고 친척들이 모두 북한에 살고 있다고 하며, 그는 그들과 관련된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다고 합니다.

어쨌든 나는 건축의 역사와 이론 분야에 대한 특별한 전문성을 갖추지 않은 채로 단지 다수의 건축가에게 흥미로운 것으로 판명된 관념들을 지닌 철학자로서 SCI-Arc에 도착했습니다. 건축 분야는 이미 하이데거, 데리다, 그리고 들뢰즈의 지배적인 영향을 차례로 받은 시기들을 거쳤습니다. 내가 도착했을 때, 들뢰즈의 꽃이 시들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건축이 철학과 진지한 대화를 계속해서 나누기를 원했던 사람 중에서 많은 이가 객체지향 철학을 제일 희망적인 것으로 간주했으며, 이런 상황은 나를 크게 압박했습니다. 그에 맞먹는 규모의 또 다른 집단은 건축이 철학적 영향에서 전적으로 자유로워질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 그리고 이런 상황 역시 나를 압박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육 년 동안 읽고 연구했습니다. 가장 중요하게도, 나는 건축가들이 말하고 있는 것과 말하지 않고 있는 것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건축에 대하여 발전하고 있던 나의 사유는 2020년에 출판된 『예술과 객체』라는 책에서 통합 정리된, 예술에 대하여 더 잘 확립된 나의 사유에 의해 인도되었습니다. 그 책은 작년에 갈무리 출판사에 의해 한국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습니다. (그리고 덧붙여 말씀드리자면, 내가 작업한 세계의 모든 나라에서, 나는 갈무리 출판사만큼 빠르고 효율적인 출판사를 본 적이 전혀 없습니다. 나는 아직도 이 회사에 깜짝 놀라며, 오늘 또다시 한국 독자를 대상으로 강연하고 있어서 기쁩니다.) 『예술과 객체』의 기본 입장은 내가 미학적 형식주의를 옹호하기를 원한다는 것이었는데, 이전과 다른 의미의 형식주의이지만 말입니다. 예술에서 형식주의의 창시자는 임마누엘 칸트였음이 확실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한, 그는 ‘형식주의’라는 낱말을 윤리학과 관련지어 사용했을 따름이지만 말입니다. 이 낱말은 상이한 맥락에서 상이한 의미를 뜻하는 데 사용되지만, 칸트에서 그 용어는 무엇이든 어떤 사물이 자신의 맥락이 미치는 영향과 별개로 갖는 자율성 혹은 자족성을 가리킵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칸트의 윤리학에서는 어떤 행위가 외재적 목적에 의해 고무된다면 그것은 윤리적이지 않습니다. 그런 목적은 천당에 가기를 원하기와 지옥에 가는 것을 피하기, 혹은 좋은 평판을 얻기를 원하기, 혹은 올바른 일을 행하지 않은 것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지 않기를 원하기 등이 있습니다. 윤리적 행위는 그 자체를 위해 행해져야 합니다. 지금까지 윤리학의 이런 입장에 대하여 많은 타당한 비판이 제기되었지만, 그것에는 부인할 수 없는 어떤 진실의 핵심이 있습니다. 행위 자체에 외재적인 어떤 이유로 행위를 수행하는 것은 사실상 윤리학이 아니라 오히려 무언가 다른 것입니다. 『단테의 부러진 망치』라는 책에서 나는 이미 후설과 하이데거의 중간쯤에 태어난 다채로운 독일 철학자 막스 셸러와 동맹을 형성했습니다. 윤리학에 관한 그의 훌륭한 책은 윤리학이 외재적 목적에 의해 고무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이유로 칸트를 옹호한 한편으로, 윤리학을 너무 공허하고 너무 보편적인 것으로 만든다는 이유로 칸트를 비판했습니다. 셸러는 윤리학의 근거를 사랑에 다시 위치시켰습니다. 이는 다른 사물들과 대조적으로 어떤 사물들에 대한 강한 정념을 뜻합니다. 어떤 윤리적 의미는 개인으로서의 나를, 혹은 미국인으로서의 나를, 혹은 남편으로서의 나를, 혹은 중년의 교수로서의 나를 속박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이들 서술에 부합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짓누르지 않습니다.

예술로 돌아가면, 칸트의 『판단력비판』의 형식주의는 그가 보기에 예술 작품은 의미의 견지에서 환언될 수 없다는 것, 예술 작품은 그것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호불호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 예술 작품은 지성의 개념들로 판단되기보다는 오히려 취미로 판단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미학적 권역에서 자율성에 관한 칸트의 구상과 관련된 문제는 자율성이 심미적 감상자가 작품으로부터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을 뜻해야만 한다는 그의 가정입니다. 그러므로 칸트는 예술에 접근하는 올바른 방식으로서 조용한 “무관심”을 강조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칸트 찬양자로서 미술 비평가이자 역사가인 마이클 프리드에서 이것은 “연극성”에 대한 혐오의 형식을 띱니다. 예술 작품은 감상자에게 아무튼 직접적으로 호소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상, 회화 속 인물이 자신이 행하고 있는 일에 매우 몰입하여서 그를 바라보는 우리에게 주의를 기울일 에너지를 전혀 남겨두지 않는 것이 더 좋은 상황입니다. 프리드는 이것이 “절대적 허구”임을 인정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바라볼 사람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면 회화도 존재하지 않을 것임이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칸트가 좋아했었을 것처럼, 예술에 대한 조용한 원격의 관찰이라는 이상적인 경우를 겨냥합니다. 이것은 프리드가 초기에 미니멀리즘을 거부한 유명한 사실에서 매우 명료하게 드러나며, 그리고 연극에 대한 프리드의 혐오를 공유하는 프랑스인 철학자이자 예술 비평가인 디드로의 시대에 그려진 반反연극적 회화에 관한 그의 멋진 책에서 거의 명료하게 드러납니다.

나는 ‘거의’ 명료하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프리드는 자신의 입장에 문제가 있음을 깨닫습니다. 한편으로, 프랑스 혁명 시기의 가장 저명한 미술가인 자크-루이 다비드 같은 화가의 경우에, 어느 특정한 회화가 반연극적인지 혹은 사실상 대단히 연극적인지 분별하는 것은 종종 불가능합니다. 프리드의 입장은 프랑스 회화에 관한 삼부작 중 그다음 두 권에서 훨씬 더 문제가 있는 것이 됩니다. 두 번째 책은 『쿠르베의 사실주의』였는데, 그 책에서 프리드는 귀스타브 쿠르베가 그 자신과 그의 회화 사이의 구분을 주도면밀하게 없앴음을 확실히 보여줍니다. 사실상 쿠르베는 가능한 가장 연극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자신의 회화 속에 그려 넣었습니다. 세 번째 책은 『마네의 모더니즘』으로, 여기서 프리드는 마네의 획기적인 모더니즘 회화들을 “대면성”에 의거하여 서술합니다. 마네 회화의 중심인물은 종종 일종의 도전적인 시선으로 직접 우리를 바라보며, 그리고 도포된 물감조차도 보는 사람의 눈을 직접 누르는 것처럼 보입니다.

요컨대, 『예술과 객체』에서 나는 프리드의 미술사적 경력을 미술의 불가피한 연극성을 수용하게 되는 비자발적인 행로로 요약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형식주의의 종말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예술은 여전히 자율적입니다. 그런데 칸트와 그의 후예들의 경우에 그렇듯이 예술 작품이 인간 감상자로부터 자율적인 채로 남아 있기보다는 오히려 예술은 작품과 감상자 둘 다로 이루어진 하나의 화합물이 됩니다. 물이 수소와 산소 둘 다로 구성되어 있다는 바로 그 이유로 물이 자율적으로 현존한다는 점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술이 작품과 인간 관람객 둘 다로 구성되어 있다는 단순한 이유로 예술이 최소한 상대적으로 자신의 환경으로부터 자율적이라는 점을 아무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귀결되는 새로운 형식주의는 감상자의 개인적 기여에 대한 여지를 훨씬 더 많이 남기고, 게다가 구식의 형식주의가 허용하지 않은 방식으로 작품이 사회정치적 맥락에 대하여 갖는 어느 정도의 관련성을 위한 여지도 남깁니다. 그것은 단지 모든 예술 작품이 자신의 맥락과 선택적으로 상호작용한다는 점을 수반할 뿐인데, 그리하여 환경 속 다양한 요소의 진입을 허용하고 거부합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전쟁의 참상뿐만 아니라 파시즘에 대해서도 가혹한 논평을 제기함이 명백한 한편으로, 그 회화가 제작된 그해 동안 정치적 세계에서 일어난 여타의 것은 모두 배제하고 있습니다.

이제 가장 최근에 한국어로 번역된 책의 주제인 건축을 살펴봅시다. 여기서 나는 또다시 칸트에 의해 고무되었는데, 그는 결국 지난 250년 동안의 시기에서 미학의 (또 그 밖의 분야의) 주요 철학자입니다. 먼저 칸트는 어떤 종류들의 아름다움은 순수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이면의 동기에 오염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칸트는 말馬의 아름다움을 언급하는데, 그것은 필시 우리로 하여금 말의 빠르기와 금전적 가치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다음에 그는 인체의 아름다움을 언급하는데, 또다시 그것은 순수하게 경험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육욕에 오염되어 있을 개연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견지에서 칸트는 건축을 살펴보는데, 그것은 자신의 효용으로 인해 순수한 아름다움에서 배제됩니다. 그 상황을 서술하는 또 다른 방식은, 칸트의 경우에 건축은 형식주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건축은 자신의 환경과 불가피하게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술과 객체』에서 나는 이미 그런 얽힘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예증했습니다. 적어도 모든 예술은 관심을 지닌 감상자와 작품의 얽힘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그 둘 사이의 연계를 단절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런 특정한 얽힘을 그 밖의 가능한 얽힘들의 환경에서 단절된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형식주의를 얻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건축은 예전보다 더 유망한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유용성에 관한 바로 그 사실로 인해 건축은 시각예술이 강요받지 않는 방식으로 칸트주의적 형식주의의 한계를 직면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특정한 건축가가 어느 특정한 건축물의 기능 혹은 프로그램을 강조하려고 아무리 많이 혹은 적게 시도하더라도 건축은 순수 공학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설계 분과학문이기도 한데, 이는 하나의 심미적 분과학문임을 뜻합니다. 미학에 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대개 핵심적인 대립이 아름다움과 추함 사이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강력히 반대합니다. 추함은 사실상 아름다움의 불행한 사촌에 지나지 않습니다. 추한 것을 보는 것은 심미적 경험을 겪는 것인데, 유쾌한 경험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불쾌한 경험이지만 말입니다. 아름다움에 참으로 반대되는 것은 직서적인 것입니다. 2023년 7월 31일 로이터 금융 뉴스에서 인용한 다음과 같은 문장을 살펴봅시다. “아마존과 애플을 비롯한 기업들의 실적 보고서와 더불어 일자리 보고서를 비롯한 미합중국 경제 데이터가 발표되는 바쁜 한 주를 앞두고, 세 가지 주요 주가지수는 모두 월요일에 거의 변동이 없었지만 한 달 동안 상승세로 마감했다.” 이 문장은 아름답지도 않고 추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직서적일 따름이라는 것을 인식합시다. 여기서 자세히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인해 지금까지 나는 종종 직서주의를 객체는 그 성질들의 총합에 지나지 않는다는 관념으로 규정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데이비드 흄이 서양 철학의 역사에서 최고의 직서주의자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객체가 “성질들의 다발”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손안에서 보고 느끼는 붉은, 단단한, 고형의, 미끈거리는 차가움 뒤에 숨어 있는 통일된 사과는 전혀 없습니다. 또한 저는 철학에서 현상학이 무엇보다도 흄의 직서주의에 대한 비판이라는 주장을 제기했습니다. 에드문트 후설과 그의 후예들의 경우에 객체는 그 성질들에 앞서 나타납니다. 한 사물은, 어떤 한계 내에서, 자신의 성질들을 모두 바꿀 수 있으면서도 여전히 동일한 객체로 남아 있습니다. 이런 취지에서 지금까지 나는 미학이란 본질적으로 객체와 그 성질들 사이에 쇄기를 박는 모든 경험을 가리킨다고 주장했습니다. 나는 종종 비유의 경우에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보여주었습니다. 그런 일은 사랑, 용기, 당혹감, 농담, 그리고 내가 어딘가 다른 곳에서 다룬 그 밖의 것들의 경우에도 일어나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19세기 이후로 건축은 종종 형태와 기능 사이의 대립에 의거하여 서술되었습니다. 몇몇 사람은 이런 구분에 의문을 제기했거나, 혹은 이들 항 중 하나를 나머지 다른 한 항으로 환원하려고 시도했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두 항 모두 건축에 필수불가결하다는 패트릭 슈마허의 의견에 동의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형태만 있고 기능이 없다면 우리는 건축이 아니라 조각을 다루고 있는 셈일 것입니다. 그리고 기능만 있고 형태가 없다면 우리는 기술적 수단의 엄밀한 경제로 어느 특정한 건축물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공학의 영역에 있는 셈일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 문제는 지금까지 형태와 기능이 둘 다 너무나 직서적으로 간주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것들이 순전히 미학적인 견지에서 탐구된 적이 딱히 없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무언가를 탈직서화한다는 것은 그것을 형식화한다는 것, 그것을 자율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 그것을 단지 부분적일지라도 자신의 성질뿐만 아니라 자신의 환경으로부터도 분리하는 것(왜냐하면 건축적 객체는 여타의 것과 마찬가지로 사적인 진공 속에 현존하기보다는 오히려 관계들의 세계 속에 현존하기 때문입니다)을 뜻합니다.

형태와 기능은 일반적으로 어떻게 다루어질까요? 어느 건축물의 ‘형태’에 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대개 그것의 시각적 외관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건축물의 진정한 형태일 수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한편으로, 건축물은 다양한 각도, 거리, 그리고 관점에서 보이는 삼차원 객체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자신이 선호하는 관점과 거리를 선택하여 그것의 엽서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딘가에서 찍은 한 장의 사진으로 한 건축물의 형태를 망라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 밖에도 건축물은 내부가 있으며, 그런 내부에 들어가는 것은 기억에 의해 결합될 일련의 경험을 겪는 것을 뜻합니다. 놀랍게도 이것은 청년 피터 아이젠만에 의해 가장 명료하게 이해되었는데, 나중에 그는 자신의 건축물과 사유에서 매우 다른 경로를 택습니다. 건축물의 ‘기능’에 대하여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것을 그것의 용도 혹은 목적으로, 사실상 그것의 현행 용도 혹은 목적으로 간주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사실상 직서주의적 기능의 문제로 시작합시다.

‘포스트모던’ 건축으로 일컬어질 수 있는 것의 초기 고전 중 하나는 이탈리아인 건축가 알도 로시가 저술한 『도시의 건축』입니다. 이 책의 가장 유명한 절 중 하나는 「소박한 기능주의에 대한 비판」이라는 제목의 절입니다. 그의 고국 이탈리아의 역사적으로 빽빽이 구축된 환경에서 글을 쓴 로시는 많은 건축물이 이제는 원래의 기능과 다른 기능을 갖추고 있으며, (기념물 같은) 많은 건축물이 애초에 어떤 확정된 기능을 절대 갖추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 로스앤젤레스 소재 SCI-Arc를 살펴봅시다. 그 건축물은 원래 철도 화물창고로 설계되었습니다. 현재 그것은 건축학교입니다. 중간에 그것은 노숙자들이 거주한 버려진 건축물이었으며, 그리고 예전에 나는 그 건축물 내부에서 대규모 레이브 파티를 벌일 수 있도록 노숙자들에게 하룻밤 비워주는 대가로 돈을 주곤 했다고 말하는 어떤 우버 택시 운전자를 만났습니다. 어쨌든 그 건축물의 내부는 2000년에 SCI-Arc가 차지하기 전에 집중적으로 수리되었지만, 그 건축물의 기본 구조는 철도 창고 시절의 구조와 동일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철도역으로 사용하든 건축학교로 사용하든 간에 어떤 심층적 기능은 여전히 현존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협소한 복도를 따라 연장된 수평적 움직임”이라고 일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실제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단일한 복도가 건축물 전체에 걸쳐 뻗어 있기에, 당신이 그 건축물에서 나와서 도시 보도를 따라 그 건축물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이동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보기를 원치 않을 사람을 보지 않기가 불가능합니다. 또한 그것은, 꽤 자주, 공식 회의가 계획될 필요가 없음을 뜻합니다. SCI-Arc의 총장은 간단히 복도를 을 수 있고, 그러면 그가 면담해야 할 모든 사람을 만날 개연성이 있습니다.

나의 책에서 다루어지는 심층적 기능에 대한 또 하나의 사례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책에서는 렘 콜하스의 런던 소재 테이트 모던 미술관 건축용 낙선 작품에 관한 제프리 킵니스의 흥미로운 논문 한 편이 고찰됩니다. 킵니스는, 그 자체로 멋진 설계이지만, 그 작품이 선정되었다면 그것은 건축을 망쳐버렸을 것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했습니다. 추정된 이유는 콜하스가 건축적 프로젝트를 제안했기보다는 오히려 가능한 한 최소의 시간에 가능한 한 가장 많은 방문객을 순환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하부구조적 프로젝트를 제안했을 따름이라는 것입니다. 킵니스는 이 설계가 특별히 미술관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부드럽게 비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건축물의 기능에 관한 로시의 진술을 떠올리면, 이것은 사실상 부정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긍정적인 것처럼 들리기 시작합니다. 마치 콜하스가 정말로 산출했던 것은 하나의 추상적 기능인 것처럼 말입니다. 혹은 킵니스의 더 화려한 서술에 따르면, 콜하스는 설계 개요를 가져다가 그것의 살과 근육과 심지어 골격도 잘라내 버리고 오직 건축물의 신경계만 그대로 남겨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이것은 건축물의 기능을 탈직서화하기 위한, 그러므로 그것을 미학화하기 위한 전략으로서 올바른 길에 들어선 것처럼 보입니다.

건축물의 형태를 탈직서화하는 것에 대하여 나는 이미 움직임의 필요성, 순차적으로 나타나는 다양한 경험의 필요성, 그리고 기억이 그 모든 것을 결합하도록 고정물이 설치될 필요성을 언급했습니다. 이것은 모더니즘의 일반적인 미학에서 벗어나는 다수의 일탈을 시사합니다. 다양성의 필요성은 비대칭성, 특권이 부여된 어떤 단일한 관점에서 전체를 볼 수 있음에 대한 금지, 준고딕 양식으로 구현된 상이한 형태들의 집적을 시사하고, 그리고 어쩌면 낭만주의의 종언과 더불어 다소 유행에 뒤떨어지게 된 구식의 픽처레스크한 것의 느낌도 시사할 것입니다. 이것들은 한 가지 더 긴급한 주요 관심사를 다룰 방법, 즉 건축을 최근 그 분과학문의 두 가지 기둥인 형태와 기능 둘 다에 대한 지나치게 직서적인 해석에서 벗어나게 할 방법에 대한 몇 가지 착상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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