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 1장 -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 발제문

작성자
deepeye
작성일
2023-08-26 11:00
조회
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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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파국으로 몰고갔던 이데올로기적 요인은 연한국에 의해 ‘초국가주의’ 또는 ‘극단국가주의’라 막연하게 불렸을 뿐, 사회적, 경제적 배경과 사상구조 분석은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나치 독일이 <나의 투쟁>이나 <20세기의 신화> 같은 세계관적인 체계를 가지고 있었던 반면, 일본 이데올로기는 그만한 개념적 조직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루야마는 공권적 기초가 결여되어 있다고 해서 그 이데올로기의 강력함을 간과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오늘날까지 일본 국민 위에서 열 겹 스무 겹의 보이지 않는 그물로 속박하고 있다. 그 전모를 파악하기 위해선 ‘팔굉위우'(전 세계는 천황 아래 한 집안이라는 뜻)’적인 슬로건을 단순히 데마고기(Demagogie) 취급할 게 아니라, 그 밑바닥에 숨어 있는 ‘공통된 논리’를 찾아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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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마루야마는 일본 국가주의가 ‘초’(ultra)라든가 ‘극단’(extreme) 같은 형용사를 앞에 달고 있는 까닭에 대해 다룬다. 근대국가는 국민국가(nation state)로 불리고 있듯, 내셔널리즘(nationalism)은 오히려 그 본질적 속성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근대국가에 공통된 내셔널리즘과 ‘극단적인’ 것의 차이는 어떻게 구별되는 것일까? 무력 팽창 경향은 이미 국민국가 형성기부터 내셔널리즘의 ‘내재적 충동’을 이루고 있었다. 이것과 비교했을 때 일본의 국가주의는 단순히 무력 팽창의 동기가 더 강력하게 발현된 것을 넘어, “대외팽창 내지 대내적 억압의 정신적 원동력에서 질적 차이”(47p)가 있다는 점에서 울트라적 성격을 띠게 된 것이다.

유럽의 근대국가는 ‘중성국가’(Ein neutraler Staat)라는 점이 큰 특색이며, 진리, 도덕 같은 내용적 가치에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런 가치의 선택과 판단은 교회나 개인의 양심에 맡기고, 국가 주권의 기초는 순수하게 형식적인 법 기구 위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메이지 이후 유럽의 근대국가와 반대 방향으로 갔다. 일본의 국가주의는 ‘내용적 가치의 실체’를 종교집단이나 개인에게 맡기지 않고 지배를 위해 이용했다. 그리고 천황에게 권위와 권력이 일원화됨으로써 주권국가가 형성됐다. 1945년 천황의 신성이 부정되는 그날까지, 일본에서 신앙의 자유, 예술, 학문, 도덕의 내용적인 결정과 타당성은 ‘천황 폐하와 천황 폐하의 정부에 대하여’ 충성 의무가 있는 관리에 의해 판단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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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국가주권은 그 내용적 정당성의 규준을 자체 내부에서 지니고 있다. 국가활동이 국가를 넘어서 있는 도의적 규준에 따르지 않는 것은, 주권자 자신 속에 절대적 가치가 체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도의’는 국체의 정화가 중심적 실체로부터 세계로 퍼져나갈 때만 성립되는 것이다. 또한 기독교의 ‘교육칙어’ 문제부터 천황기관설에 이르기까지 국체는 논의되기만 하면, 곧바로 정치적 대립으로 이행되었다. ‘국체명징’은 자기비판이 아니라, 언제나 다른 것을 압도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의 하나였다. 이에 비해 순수한 내면적 윤리는 끊임없이 ‘무력함’을 선고 받았다. 사회에서 윤리의 내면화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권력화되어 외적으로 나타났으며, 국민정신총동원과 같은 것이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한편 윤리의 권력화는 곧 윤리적인 것에 의해서 권력 역시 중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나치 시대 독일인의 경우 토마스 만이 지적했듯, 정치는 본질적으로 비도덕적이고 잔인한 것이라는 생각이 잠재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압축적 인식이 일본인에게는 불가능하다. 그들의 권력적 지배는 심리적으로 강한 자아의식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국가권력의 합일화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었다. 마루야마는 패전 이후 한없이 나약해진 일본 군인들의 모습에서 이런 분석의 근거를 찾는다. 독일의 경우 학대자와의 관계는 ‘자유로운’ 주체와 사물(Sache)의 그것에 가까웠다면, 일본의 경우는 자신들이 궁극적인 천황에게 더 가까이 있다는 점에서 우월함을 느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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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을 중심으로 한 종적 위계가 가장 극대화된 곳은 일본의 군대다. 이들은 민간인에 대해 터무니없는 우월의식을 드러냈는데, 그 근거는 황군 관념에 기초하고 있다. 한편 역설적이게도 이런 곳에서 ‘독재’(dictatorship) 관념은 오히려 생겨나기 어렵다. 본래 독재 관념은 자유로운 주체의식을 전제하고 있지만, 군국주의 일본에서는 주체의식을 가진 개인이 위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루야마는 이런 사회를 두고 ‘의식으로서의 독재’와 혼동하지 말 것을 강조하며, ‘사회적 결과로서의 독재’라고 명칭한다. 전자는 명확한 책임의 자각이 결부되어 있지만(나치 독일), 일본의 군부와 관료에게는 그러한 자각이 결여되어 있었다. 이런 사회에서는 각자가 행동의 제약을 자신의 양심 속에 지니지 않고, 상급자의 존재에 의해 규정됨으로써 독재 관념 대신 ‘억압의 이양’에 의한 정신적 균형의 유지라고 할 수 있는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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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국가주의에서 권위의 중심적 실체인 천황 역시 주체적 자유의 소유자는 아니다. 근세 초기 유럽의 절대군주는 중세 자연법에 기초한 지배적 계약의 제약으로부터 해방되어, 스스로 질서의 옹호자에서 그것의 작위자로 높아졌다. 그러나 메이지유신에서 정신적 권위가 정치적 권력과 합일되었을 때, 그것은 단순히 ‘진무’ 천황이 창업했던 ‘옛날’로 되돌아간 것이었다. 천황 역시 무한한 옛날로 거슬러올라가는 전통의 권위를 등뒤에 짊어지고 있던 것이다. 이런 토대 위에서 일본의 초국가주의가 전개된 것이며, “중심적 실체로부터의 거리가 가치의 규준이 된다는 국내적 논리를 세계로 향해 확대할 때, 거기에서 ‘세계의 모든 국가는 각각 그 자리를 얻게 한다’는 세계정책이 나오게 된다.”(63p) 일본 국민은 1945년 8월 15일, 초국가주의 체계의 기반인 국체가 절대성을 상실하고 나서야 처음으로 자유로운 주체가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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