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 3장 - '군국지배자의 정신형태' 발제문

작성자
deepeye
작성일
2023-09-16 09:48
조회
259
1. 문제의 소재

전후 도쿄재판에서 연합국 사람들은 일본제국의 내부 상황을 알게 되면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대중국전을 치르면서 소련과의 전쟁을 준비하고, 그 와중에 세계 최강대국인 미합중국 및 대영제국에 공격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이번 장에서 마루야마는 당시 도쿄 재판의 검찰측과 변호인측 그리고 전범들의 기록을 통해 합리적인 이해를 넘어선 일본의 상황을 드러내고자 했다. 우선 미국측 변호인들의 입장을 살펴보면, 그들은 검찰측에서 제기한 ‘압도적 군비확대’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돈키호테'가 아니고서야 열악한 소수의 항공기로 누가 전 세계를 정복하러 나서겠냐고 변론했다. 한편 독일과 더불어 전형적인 ‘전체주의’ 국가로 선전되어온 일본제국이지만, 조직성의 약함, 지도세력의 분열과 불안정함은 나치즘과 대비되고 있어 그들을 놀라게 했다. 명확한 신념을 가진 나치와 달리 일본측 피고인들은 정치이념의 일치나 상호 협조도 존재하지 않았다. 변호인들이 반박을 위해 내세운 가장 큰 증거는 ‘지도력의 결여’였다. 마루야마는 이런 일본의 비합리적 결단의 방대한 퇴적, 맹목성을 경시하거나 말살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디까지나 계속 살리면서 어떻게 해서 거시적인 이른바 역사적 이성의 시각과 연결”(135) 시킬지 고민했다.

2. 나치 지도자와의 비교

마루야마가 다음으로 주목하는 것은 동서파시즘의 차이다. 나치 지도자는 모르핀 중독자, 주정뱅이 등 정상적 사회의식에서 배척당한 무법자들의 집합소였으나, 도쿄재판에 선 일본인 피고인들은 극히 예외를 제외하고 대부분 젊을 때부터 장래가 촉망받는 엘리트들이었다. 또한 나치가 "그것이 지당한 논의인지 아닌지는 관계 없다.”(139)고 전쟁 개시를 단언했을 때,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공공연하게 결단의 원칙을 드러낼 용기가 없었고, 황도 뒤에 숨어서 다른 민족에게 자혜로운 행위를 베푼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개개의 구체적인 살육행위의 구석구석까지 ‘황도’를 침투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지배권력은 도덕화에 의해서 국민을 기만하고 세계를 기만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자기자신을 기만했던 것이다.”(142)

나치나 일본 군국주의자들이나 어느 쪽이든 죄의식은 없었다. 하지만 한쪽은 죄의 의식에 정면으로 도전해서 그것을 극복하려고 했지만, 다른 쪽은 자신의 행동에 끊임없이 윤리적 분위기를 고취시킴으로써 회피하고자 했다. 전직 수상, 각료, 고위의 외교관, 선전가, 육군의 장군, 원수, 해군 제독 및 궁내대신들로 구성된 25명의 일본인 피고들에게 공통됐던 것은, 그들 중 누구 한 사람도 이 전쟁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고 진술한 것이었다. 마루야마는 이들의 책임회피를 개인도덕으로 귀착시키기에는 너무나도 뿌리 깊은 원인이 있다고 강조한다. 개인의 타락 문제가 아니라, 체제 그 자체가 타락한(decadernce) 상징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알기 위해 중요한 것은, 피고들이 과거 자신의 행동을 전체적으로 어떤 근거에서 정당화하려고 했는지 분석하는 일이다.

3. 일본 파시즘의 왜소성 – 1

피고들의 자기변호를 가려내보면 두 가지 큰 논리적 광맥에 다다르는데, 첫 번째는 ‘기정 사실에 대한 굴복’이고 두 번째는 ‘권한으로의 도피’다. 전자의 핵심은 이미 현실이 그렇게 형성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없이 따르게 됐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마루야마가 주목하는 것은 ‘하극상’이다. 일본의 최고 권력을 장악한 사람들은 자기 부하들의 로봇이며, 그 부하들은 또 현지에 파견된 군부와 그것과 결탁한 우익 낭인들에게 끌려다녔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은 앞서 마루야마가 일본 사회체제에 내재하는 정신구조로서 언급했던 ‘억압 위양의 원리’와 일견 모순되는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이 개념은 일상생활에서 상위자로부터의 억압을 하위자에게 순서대로 떠넘김으로써 전체의 정신적인 균형이 유지되는 체계를 말하는 것인데, 마루야마는 오히려 ‘하극상’이야말로 억압 위양이라는 방패의 반쪽 면이며, 병리 현상이라고 지적한다. 그것은 익명의 무책임한 힘의 비합리적 폭발이며, 아래로부터의 힘이 공공연하게 조직화되지 않은 사회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정말로 민주적인 권력은 공공연하게 제도적으로 아래부터 선출되고 있다는 것을 프라이드로 가질 수 있는 한에서 오히려 강력한 지도성을 발휘한다.”(159) 하지만 일본처럼 위로부터의 권위에 의해 통치되고 있는 사회의 통치자가 왜소화된 경우 무법자 혹은 무책임한 부랑자들의 의향에 실절적으로 끌려다니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른바 ‘뒤집힌 민주주의’다.
4. 일본 파시즘의 왜소성 - 2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권한으로의 도피’다. 도쿄 재판 범죄자들은 공통적으로 ‘관제상의 형식적 권한 범위’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을 변호 논리로 내세웠다. “일생 동안 한 사람의 관리”라는 것을 근거로 삼거나, 자신은 정책 결정을 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는 것이다. 마루야마는 이들 피고들의 태도가 결코 단순히 그 자리에서 생각해낸 책임회피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들 대부분은 제국의 관리들이며, “아무리 정치적으로 행동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혼 밑바닥에는 언제나 막스 베버가 말하는 ‘관료정신’(Beamtengeist)이 잠재되어 있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이 되면 언제라도 법규에 규정되어 있는 엄밀한 직무권한에 따라서 행동하는 전문관리(Fachbeamte)가 될 수 있는 것이다.”(164)

‘권한으로의 도피’는 각각 세로로 천황의 권위와 연결됨으로써 각자의 ‘권한’의 절대화로 전환되고, 거기에 권한 상호간에 끝없는 갈등이 점점 더 확대된다. “관료에게는 일관된 입장이나 이데올로기가 없으며, 또 전문적인 관리로서 가지는 것이 허용되지도 않는다.”(168) 일반적으로 군주제하에서 정치적 통합을 확립하는 방법은 기껏해야 몇 가지 경우 밖에 없다. 하나는 군주가 카리스마적 자질을 가진 거대한 인격인 경우, 다른 하나는 민주주의국가처럼 변함없으며 실질적으로 강력한 의회가 존재하는 경우다. 그러나 전자는 말할 것도 없고, 후자 역시 특수한 역사적 조건(영국)이 아닌 한, “근대의 군주제는 표면상의 장엄한 통일 이면에 무책임한 익명의 힘의 난무를 허용해주는 내재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170) 정치 세력의 다원적 병존 속에서 일본의 중신, 기타 상층부의 자유주의자들은 천황의 절대주의적 측면을 없애려고 한 반면, 군부나 우익 세력은 천황의 권위를 통해 자신들의 자의를 관철시키고자 신권설을 휘둘렀다. 이 사이에서 천황은 절대군주로서의 카리스마를 잃어버림과 동시에 입헌군주로서의 국민적 친근감도 옅어지게 됐다.

5. 맺음말

여기까지가 마루야마가 그려본 일본 파시즘 지배의 방대한 ‘무책임의 원칙’에 대한 소묘다. 이 안에서 활약했던 정치적 인간상을 추출해보면 세 가지 기본적 유형을 찾아볼 수 있다. 첫째는 ‘신을 모시는 가마’이며, 둘째는 ‘관리’이고, 셋째는 ‘무법자’(혹은 낭인)이다. 신을 모시는 가마는 ‘권위’를 관리는 ‘권력’을 낭인은 ‘폭력’을 대표한다. 국가 질서 속 지위와 합법적 권력에서 보면 커다란 위계 차이가 있지만, 체계의 행동은 가장 아래의 ‘무법자’로부터 촉발되며, ‘신을 모시는 가마’는 단순한 로봇과 다를 바 없다. ‘신을 모시는 가마’를 옹호하며 실권을 휘두르는 것은 문무 관리들인데, 이들은 정통성을 권력의 기반으로 인민을 지배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무법자에 대해서는 꽁무니를 붙잡혀 끌려다녔다. 그러나 무법자도 진지한 ‘권력의 대한 의지’를 갖고 있지 않았다. 다만 무책임하게 날뛰고 세상을 놀라게 하며 쾌재를 부르는 것으로 만족했던 것이다. 이 세 유형은 고정적인 것이 아니며, 한 사람 내부에 혼재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전체 계서제에서 중요한 것은, “가마-관리-무법자라는 형식적 서열 그 자체는 매우 강고하며, 따라서 무법자는 스스로를 보다 ‘관리’적으로 내지는 ‘신을 모시는 가마’적으로 변용시키지 않고서는 결코 위로 승진할 수 없다는 것”(174)이다. 바로 그 점이 무법자가 국가권력을 장악한 하켄크로이츠 왕국과 현저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측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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