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차이와 반복』 2장 5절

작성자
bomi
작성일
2022-06-05 09:21
조회
329
들뢰즈와의 마주침 세미나 ∥ 2022년6월 5일 일요일 ∥ 손보미
텍스트: 『차이와 반복』질 들뢰즈, 김상환 옮김, 민음사


2장 대자적 반복

5절 유사성과 차이

<유사성과 차이>

영원회귀에 의해 변용되는 체계들은 어떤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먼저 생각해 볼 두 가지 명제
1) 오로지 서로 유사한 것만이 차이를 지닐 수 있다.
2) 오로지 차이들만이 서로 유사할 수 있다.

1) 오로지 서로 유사한 것만이 차이를 지닐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유사성이 차이의 조건이다.
이 정식은 서로 유사하다는 조건에서만 서로 다른 두 사물이 있다면서 두 사물에 대해 동일성을 띤 개념이 가능해야 한다고 요구할 것이다. 또한 이 (동일설을 띤) 개념과 각 사물의 관계 안에서 어떤 유비가 성립한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전제할 것이다. 그리고 끝내는 차이를 세계기(유사성, 동일성, 유비)에 의해 규정되는 어떤 대립으로 환원하기에 이를 것이다.

반면,

2) 오로지 차이들만이 서로 유사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유사성 그리고 또한 동일성, 유비, 대립 등은 어떤 효과들로서 이것들은 모두 어떤 일차적 차이에서 비롯되는 산물, 혹은 차이들의 일차적 체계가 낳는 산물들에 불과하다.
이 정식에 따르면, 차이는 차이나는 항들을 서로 직접적으로 관계지어야 하며 차이는 그 자체로 분절화이고 묶기여야 한다.
차이는 차이나는 것을 차이나는 것에 관계짓되 동일한 것, 유사한 것, 유비적이거나 대립적인 것에 의한 어떠한 매개도 없이 관계지어야 한다.
차이의 분화 分化 단순하거나 등질적인 것에서 복잡하거나 이질적인 것으로 변함. 생물체나 세포의 구조와 기능 따위가 특수화되는 현상. (예) 종의 분화
가 있어야 하며, 분화소로서의 즉자적 차이, 스스로 나뉘는 차이가 있어야 한다. 이 분화소를 통해 차이나는 것은 차이나는 동시에 회집되어 있을 뿐, 결코 어떤 선행의 유사성, 동일성, 유비, 대립등의 조건 아래 재현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더 이상 조건이 아니라 일차적 차이와 그 차이의 분화가 가져오는 효과들, 전체상의 효과들이거나 표면적 효과들에 불과하다. 이 효과들은 변질된 재현의 세계를 특징짓고, 차이의 즉자 존재가 스스로 숨어 들어가는 방식을 표현한다.

그렇다면,
이 두 정식은 말하는 방식의 차이일 뿐, 내용상 별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닌가?
이 두 정식은 전적으로 다른 체계들에 대응하는가, 아니면 똑같은 체계들에 대응하므로 결코 양립, 통약 불가능한 두 해석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인가?



<체계란 무엇인가>

차이의 즉자 존재가 자기 자신을 숨기는 것, 차이가 재현의 범주들 안으로 떨어지는 것은 똑같은 조건들 아래에서 벌어지는 사태이다. 그렇다면 (거꾸로)
- 차이가 ‘분화소’le différenciant le différenciant: différencier 1. 구별[구분]하다, 구별되다, 분화되다. 2. [수학] 미분하다


에 해당하는 이 즉자 존재를 전개해가는 것은 어떤 조건들에서인가?
- 차이는 어떤 조건들에서 가능한 모든 재현을 넘어서서 차이나는 것을 회집하는가?

하나의 체계는 둘이나 그 이상의 복수적인 계열들을 기저로 삼아 구성되어야 한다. 이때 각 계열은 자신을 이루는 항들 사이의 차이들에 의해 정의된다. 만일 우리가 계열들이 이러저러한 힘의 활동에 따라 서로 소통하기 시작한다고 가정한다면, 이 소통을 통해 일군의 차이들은 다른 일군의 차이들과 관계를 맺는 것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체계 안에서 어떤 차이들의 차이들이 구성되는 것이다. 이 두 번째 등급의 차이들-차이들의 차이들-은 ‘분화소’의 역할을 떠맡는다. 다시 말해서 첫 번째 등급의 차이들을 일정한 관계 안에 묶어 놓는다. 다질적 계열들 간의 1) 짝짓기, 거기서 비롯되는 2) 체계 내적 공명, 거기서 비롯되는 3) 강요된 운동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운동의 진폭은 기저 자체의 계열들 밖으로 넘친다. 그 요소들이 속한 한 계열 안에서 성립하는 차이와 한 계열에서 다른 계열로 이어지면서 성립하는 차이의 차이. 이런 차이들은 곧 어떤 강도들이다.
고유한 특성 안에서 볼 때 강도는 그 자체가 어떤 차이에 의해 구성된다. 하지만 이 차이는 다시 다른 차이들에 의해 형성된 차이다. (E-E’에서 E는 e-e’를, e는 ε-ε’를 배후로 한다.)
강도적 장 속에서는 자극이나 흥분들에 해당하는 어떤 규정 가능한 차이들, 그리고 길 트기에 해당하는 어떤 –규정 가능한- 차이들의 차이들이 분배되고 있다.
그러나 체계들 일반의 세 차원(짝짓기, 공명, 죽음본능)을 구현하는 것은 무엇보다 프시케의 종합들이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묶기인 하비투스는 흥분의 계열들을 짝짓고, 에로스는 거기서 비롯되는 각별한 상태의 내적 공명을 지칭한다. 그리고 죽음본능은 강요된 운동과 구별되지 않는데, 이 운동의 심리적 진폭은 공명하는 계열들-에로스의 진폭- 자체를 넘어선다.
다질적인 계열들 사이에 소통이 일어나면, 이로부터 체계 안에서는 온갖 종류의 귀결들이 따라 나오게 된다. 어떤 시-공간적 역동성들이 체계를 가득 채우고, 이러한 체계는 짝지은 계열들의 공명과 그 계열들 밖으로 넘치는 강요된 운동의 진폭을 동시에 표현한다. (266)

이 체계에는 어떤 주체들이 서식한다. 그 주체들은 애벌레-주체인 동시에 수동적 자아들이다. 여기서는 주체들이 수동적 자아인 이유는 이들이 짝짓기와 공명들에 대한 응시와 구별죄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은 역동성들의 지지대이거나 인내자이기 때문에 애벌레-주체들이다.
강요된 운동에 필연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순수한 시-공간적 역동성은 오로지 생존 가능성의 극한에서만 체험될 수 있다. 훌륭하게 구성된 주체, 독립성과 능동성을 띤 모든 주체는 이 순수한 역동성을 통해 죽음에 이를 것이다. 이는 이미 발생학이 가르쳐주고 있는 진리다.
강요된 운동들은 그저 견뎌낼 수밖에 없고, 따라서 그 앞에서는 누구나 수동적인 인내자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한에서 이 인내자는 다시 어떤 유충이나 맹아일 수밖에 없다. 이처럼 진화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퇴화를 겪은 것만이 진화한다. 즉 안으로 말린 것만이 밖으로 펼쳐진다.

체계는 오로지 애벌레-주체들만을 허용한다. 왜냐하면 그런 주체들만이 강요된 운동을 만들어낼 수 있고, 그런 가운데 그 운동을 표현하는 역동성들의 인내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체계는 단지 체계 밖으로 넘쳐나는 다질적 계열들에 의해서만 정의되는 것도 아니고, 체계의 차원들을 구성하는 짝짓기, 공명, 강요된 운동 등으로도 온전히 정의하지 못한다. 그 체계에 서식하는 주체들이 있어야 하고, 그 체계를 가득 채우는 역동성들이 있어야 하며, 마지막으로는 이 역동성들로부터 개봉되는 질과 연장들이 있어야 한다.



<어두운 전조와 분화소>

다질적 계열들의 소통, 짝짓기, 공명은 계열들 사이에는 어떤 최소한의 유사성이 있고, 소통을 일으키는 작인 안에는 어떤 최소한의 동일성이 있다는 조건에서 성립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소통을 보장하는 이 작인, 이 힘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번개는 서로 차이나는 강도들 사이에서 번쩍인다. 하지만 그 이전에 어떤 어두운 전조가 선행해야 한다. 이 전조는 볼 수 없고 느낄 수도 없지만, 마치 음각처럼 패여 있으면서 번개의 길을 전도된 방향에서 미리 규정한다.
마찬가지로 모든 체계는 저마다 어두운 전조를 포함하고 있고, 인접해 있는 계열들은 이 전조를 통해 비로소 소통하게 된다. 그렇다면, 전조가 이 역할을 실행하는 방식은 어떠한가?

전조에는 어떤 자기 동일성이 있다. 또 전조를 통해 소통하게 되는 계열들 사이에는 확실히 어떤 유사성이 있다. 하지만 이 ‘있다’는 전적으로 미규정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다. 그렇다면 이 동일성과 유사성은 어두운 전조가 작동하기 위한 조건들인가, 아니면 작동방식의 효과들인가?

어두운 전조는 자기 자신 위에 필연적으로 어떤 허구적 동일성의 가상을 투사한다. 또한 자신에 의해 회집된 계열들 위에서는 필연적으로 어떤 소급적인 유사성의 가상을 투사한다. 그래서 동일성과 유사성은 어떤 불가피한 가상이나 착각들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런 불가피성은 전조 자체에서 비롯된다. 그 보이지 않는 전조는 자기 자신을 숨기고 자신의 작동방식을 감출 뿐 아니라 또한 동시에 차이의 즉자 존재를 감춘다.

두 개의 차이들의 계열이 주어진다면, 전조는 이런 차이들의 분화소로서 행동한다. 어두운 전조는 자신의 고유한 역량을 통해 차이들을 직접적이고 무매개적으로 서로 관계짓는다.
어두운 전조는 차이의 즉자 존재 또는 ‘차이짓는 차이소’이다. 즉 전조는 두 번째 등급의 차이, 자기 자신과 차이나는 차이다. 차이나는 것은 이런 차이를 통해 비로소 차이나는 것과 관계하게 된다. 전조가 그리는 궤적은 보이지 않거나 혹은 오로지 거꾸로만 보일 뿐인데, 자신이 체계 안으로 유도하는 현상들에 의해 뒤덮이고 이리저리 스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전조는 자신이 ‘결여한’ 자리 말고는 다른 자리에 없고 자신이 결여한 동일성 말고는 다른 동일성을 갖지 않는다. 정확히 말해서 전조는 고유한 동일성이 없을 뿐 아니라 언제나 ‘제 자리에 없는’ 대상=x이다.

반성은 전조에 추상적으로 논리적 동일성을 빌려주고, 전조가 회집하는 계열들에는 물리적 유사성을 빌려준다. 하지만 이런 동일성과 유사성은 단지 전조의 작동방식이 체계 전반에 가져온 통계적 효과에 불과하다. 어떤 제3항의 동일성과 부분들의 유사성은 다만 차이의 재현을 위한 조건일 뿐이고, 이 재현을 통해 표현되는 것은 차이의 존재와 차이의 사유가 변질되는 과정이다.

우리는 어두운 전조, 이 차이의 즉자 존재를 ‘계속되는 불일치’라고 부른다. 이 두 번째 등급의 차이를 통해 그 자체로 다질적이거나 불균등한 계열들은 일정한 관계 안에 놓인다.
이렇게 관계를 맺은 차이들의 상대적 크기를 규정하는 것은 그 두 번째 등급의 차이가 경우마다 다르게 드러내는 전치의 공간과 위장의 과정이다. 그런데 사실 (양적인) 크고 작음은 차이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이는 같음과 유사성을 기준으로 차이를 판단하기 때문이다. 차이를 자신의 분화소와 관련지어 본다면, 우리는 그것의 분열 가능성들, 즉 분화소의 전치와 위장에 따라 차이가 크거나 작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즉자적 측면에서 볼 때 차이는 크든 작든 언제나 내적이라는 점이다.
어떤 체계들은 커다란 외적 유사성을 지니면서도 작은 내적 차이를 가지지만, 반대고 작은 외적 유사성을 지니면서 커다란 내적 차이를 가진 체계들도 있다. 하지만 불가능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모순적인 것이다.(?) 어쨌든, 유사성은 항상 외부에 있고, 차이는 언제나 체계의 핵심을 형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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