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일본을 찾아서 2』 12장 '메이지 국가의 건설' 발제문

작성자
deepeye
작성일
2022-08-20 16:37
조회
369
들어가며

메이지 시대의 첫 10년이 끝날 무렵, 기도, 사이고, 오쿠보가 사망함으로써 메이지 지도부가 쇄신되었다. 메이지 지도자들은 군사, 경제, 외교 등 전방위적으로 능력 행사를 했으며, 전문화 된 관료집단은 다음 세대가 권력을 물려받은 이후에야 등장할 수 있었다.

1. 마쓰카타 재정

- 마쓰카타 마사요시는 10년 넘게 대장경에 재직하면서 ‘마쓰카타 재정’, ‘마쓰카타 디플레이션’이라는 용어를 낳을 만큼 당시 일본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 당시 사무라이들에게 지급했던 질록은 신정부 세입의 3분의 1에 달할 만큼 컸다. 개혁 조치는 사족 반란(세이난 전쟁)의 원인이 되었고, 1877년 전쟁 진압을 위한 정부의 통화량 증가는 인플레이션을 불러왔다.

- 외채 때문에 식민지로 전락한 이집트의 사례는 메이지 지도자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왔다. 중대한 문제는 초기 단계의 산업을 보호하는 것이었는데, 열강과 맺은 불평등 조약이 발목을 잡았다.

- 거품경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부의 대응은 디플레이션을 불러왔다. 정부 소유 산업체의 민영화, 새로운 세금 부과는 영세농민들을 비참한 현실로 내몰았다.

- 일본사에서 ‘마쓰카타 재정’은 매우 논쟁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다수의 연구가 농촌의 극심한 경제적 분화, 농민을 현혹시킨 자본주의적이고 군국주의적인 정부의 교묘한 조작으로 해석해왔지만, 한편에선 이런 논제를 전면 부인하는 연구도 이루어졌다. 무엇보다 이 시기의 가장 특기할만한 점은, 과학적 사고와 테크놀로지가 생산에 적용되면서 경제 변화에 필수적이었던 하부구조의 발전으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2. 정치참여 투쟁

- 정한론 논쟁 때 조슈, 사쓰마 세력에 밀려난 도사번의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장외에서 민권 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1874년 발표한 ‘민선의원설립건백서’에는 1) 인민의 참여권리를 당연한 전제로 주장한 것 2) 참여가 단결과 공통의 목적 의식을 유발하여 당쟁에서 벗어나게 해준다는 것 3) 서양의 시행착오를 반면교사 삼아 신속하게 근대화를 추진해나갈 수 있다는 진보적 시선이 드러나 있다.

- 대의정치에 대한 열정은 이타가키의 운동이 출범할 당시의 협소함에서 벗어나, 인민의 권리가 자유와 연계되면서 ‘자유민권운동’으로 나아갔다. 당시 많은 일본인들이 서양서 번역을 통해 전달된 ‘자유’와 ‘민권’에 대해 고민하며 변화했다.

- 이타가키 다이스케의 자유당이 프랑스 혁명의 슬로건과 열정에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면, 오쿠마 시게노부의 입헌개진당은 영국식 의회, 헌법 사상과 관행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 자유당 간부의 상당수는 사족 출신이었고, 당원은 다수의 양조업자와 농촌 유지로 구성되었다. 반면 입헌개진당의 경우 농촌보다 도시주민의 이익을 보호하는 데 주력했다.

- 구미 각국 외에 의회가 운영되지 않던 시대에, 일본에서 벌어진 논쟁이 헌법의 필요성에 관한 것이 아니라, 누가 헌법을 기초하고 어떤 내용이 포함되어야 하는지에 초점이 맞춰졌던 것은 경이적이었다. 또한 후세에 농촌에서 발견된 국회를 개설하라는 건의서, 사의헌법(민간헌법) 등은 당시 전국적으로 활발했던 정치의식을 증명한다.

- 헌법은 권력집단에게는 천황을 정쟁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수단이었고, 도사나 사가 출신의 불만세력에게는 다시 영향력을 확보할 기회였으며, 농촌주민에게는 독단적인 관리들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는 장치였고, 소작농에게는 농민저항을 정당화할 수 있는 구실로 작용했다.

3. 이토 히로부미와 메이지 헌법

- 이토가 독일헌법에 관심을 가진 데는 비스마르크의 영향이 컸다. 당시 비스마르크는 급진적 대중주의를 경계했고 정부의 특권을 보호하기 위한 일련의 방책을 만들어냈다.

- 그는 천황제 보호를 위한 조치로 화족제도를 신설했다. 천황과 평민 간의 분리를 공식화한 것이다.

- 다음 조치로는 천황에게서 공적 책임을 면제하기 위해 헤이안 시대의 산물인 태정관을 분리시키고 내각제를 공포하였다. 첫 총리는 이토였고 이후 조슈와 사쓰마 출신들이 번갈아가며 내각을 장악했다.’

- 이토에게 있어 천황과 황실의 권위는 모든 인민을 하나로 단합시키는 기축이 되어야 했다.

- 1889년 2월 11일 천황을 토대로 하여 의회에 예산, 법률 등의 결정권을 준 입헌정체가 수립되었다. 2월 11일은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의 손자 진무 천황의 즉위를 기념하는 기원절이기도 한데, 이날 헌법을 발포함으로써 황실의 창설과 연속성을 천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1868년 그랬듯이, 근대성과 변화는 고대의 쇄신으로 제시되었다.

4.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제국군대

-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메이지 지도부에서 이토 다음으로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는 오랜 기간 일본 육군을 지배했고 사후에도 그가 남긴 파벌은 일본의 군사 정책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 메이지 정부는 사쓰마-조슈 세력 파벌들의 정부라는 뜻에서 번벌 정부라 불렸다. 사쓰마와 조슈 사이에서도 주도권 싸움이 있었지만, 이들은 다른 ‘외부’ 정치세력과 마주할 경우 함께 뭉쳐 대항했고, 천황에게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장악하고 있었기에 지배력을 잃지 않았다.

- 산업발전과 인구증가는 시민병으로 구성된 대규모 군대의 가능성을 열어주었고, 메이지 정부는 군사 영역에 있어서도 서양을 시찰하면서 얻은 교훈을 적용했다. 야마가타는 1872년 징병제가 공포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그에게 징병제는 미래세대에게 시민의식을 교육시키는 방편이었다.

- 또한 그의 주도하에 군부는 내각을 거치지 않고, 천황을 직접 알현하여 정책과 전략에 관해 직접 보고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됐다. 야마가타는 지방자치제도와 치안정책에 있어서도 통제, 질서, 통일성과 같은 군사적 발상으로 접근했는데, 그 결과 비밀결사와 집회 금지, 경찰의 삼엄한 일상 단속으로 이어졌다.

5. 모리 아리노리와 메이지 교육

- 모리는 1885년 이토 히로부미가 구성한 초대 내각의 문부대신으로 임명되었고, 짧은 재직기간에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유지된 교육제도를 남겼다.

- 교육 지도자들은 도쿠가와 시대의 훈계식 교육을 개혁하려고 했으나, 당시에는 선결과제인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재원도 부족했다. 그래서 난립해 있는 공립, 사립학교를 단일한 국가교육제도 안에서 재정비하는 것이 선결과제였다.

- 메이지 초기 교육의 방향은 영미의 교육가들이 목표로 삼았던 성취와 자아실현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 그러나 1880년대 들어서는 자유민권운동의 영향, 급진적인 견해들의 등장으로 메이지 정부의 입안자들은 교육의 내용과 통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 교육 논쟁의 한 극단에는 학교의 본분이 평민을 천황의 병사로 준비시키는 거라고 생각했던 일부 육군 지도자, 유학자들의 견해가 있었다. 또 다른 극단에는 유교와 국수주의의 비실용적이고 비경제적인 도덕관을 배척하고, 실용성에 초점을 둔 후쿠자와 유키치의 교육관이 자리했다. 이토 역시 실용주의 노선을 걸으며 보수적인 교육가들을 경계했지만, 문부성의 주도권이 그들에게 넘어가면서 천황, 국가에 대한 도덕이 교과과정의 맨 앞에 놓이게 되었다.

- 서양에서 돌아온 메이지 지도자들은 내셔널리즘적 성향이 강해지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모리 역시 그런 경향을 띄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국가였고, 교육은 학생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었다.

- 모리는 문부대신에 취임한 직후 네 가지 학교령(제국대학령, 사범학교령, 소학교령, 중학교령)을 제정해 위계적인 엘리트 교육을 형성했다 ‘제국’ 대학 출신들은 압도적인 특혜를 누렸으며, 향후 메이지 초기 세대가 떠난 뒤 일본을 통치하게 될 새로운 엘리트 세대로 서게 됐다.

- 모리는 유교적 사고관을 교육으로 주입하는 것에 반대했는데, 그가 광신적인 젊은이에게 살해당하고 상황이 급변했다. 유교학자인 모토다와 그 일파는 메이지 이데올로기의 초석이 된 교육칙어’ 선포와 함께 목적을 이루었다. 이제 서구화과정은 종지부를 찍었고, ‘교육칙어’는 천황의 초상화와 함께 일본 전역의 학교에 배포되었다.

6. 요약: 메이지 지도자들

- 세월에 따라 메이지 지도자들에 대한 평가는 변화를 겪었다. 전전(戰前)의 일본에서는 동상이 세워지고 칭송되었지만, 전시에는 무기 제조를 위해 동상이 파괴되었고, 전후에는 제국의 역사에 대한 종전의 평가를 번복했다.

- 야마가타, 이토, 이타가키, 마쓰카타는 각 분야의 전문가인 동시에 리더십을 갖고 다방면의 일을 수행했다. 하지만 이들 개개인의 정치적 쇠락이 역사에서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낸 것 같지는 않다. 메이지 지도부는 이질적인 집단이었으나, 핵심사안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칠했고 집단의 존폐가 위험에 처할 때는 단합했기 때문이다.

- 메이지 지도자들이 국가의 틀을 형성해나간 실용주의자로 활기찬 토론과 자신의 견해를 스스럼없이 밝혔다면, 이후 등장한 세대의 인물들은 구조화된 관료제 내에서 경력을 쌓아야했기 때문에 군사적, 정치적 파벌을 깊이 인식하고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 메이지 지도자들은 여러 겹의 보호막으로 천황을 지켜주었고, 대의기구를 견제하기 위해 천황의 각료 임명권을 이용하였다. 그리고 대중의 무질서를 진압하기 위해 경찰력을 동원했으며 천황의 통치가 곧 도덕과 정의임을 알리는 조칙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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