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일본을 찾아서 1』 7장. 교육·사상·종교 발제문

작성자
jesbest
작성일
2022-07-30 12:08
조회
317
1. 교육

5대 쇼군 쓰나요시, 8대 쇼군 요시무네, 간세이 시대(1789~1801): 교육의 중요성 ↑
교육과 관련된 노력은 먼저 사무라이에 대한 관심과 함께 시작되었다.
-18세기에는 지배층 자제만 입학할 수 있는 번교가 급격히 증가했다. 대부분의 번교는 유학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학생들은 한자로 된 텍스트 독해능력을 기르는 데 치중했다.
-사숙(시주쿠) 역시 급격히 퍼져 나갔다.
-서민학교 데라코야나 향교 등은 사무라이 학교에서 주로 공부하던 중국 고전에 중점 두지 않고, 단순한 도덕성, 실제적 기술 습득에 주안점을 두었다.
상업활동의 복잡성, 마을 지도자들의 의무 때문에 식자능력이 보급되고 출판이 성장했다. 19세기 초 일본은 농업사회들 중 식자능력이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였다.

2. 유교의 보급

도쿠가와 시대 유교 범주는 우선 충(忠)에서 출발하여 효(孝), 은(恩), 의(義), 화(和), 성(誠) 등을 포함하게 되었다. 윤리도덕을 위한 자기수양 추구는 일본의 전통 속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불교를 비롯해 유교사상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도쿠가와 시대 훨씬 이전에 일본에 들어왔다. 불교적 세계관이 조정을 지배했던 반면 공가의 학습은 유교경전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 (12세기 송대 유학자 주시의 학문)

성리학은 근세 중국과 조선에 강력한 종합사상과 이데올로기를 제공했다. (과거제도 통한 포상) 고정된 신분제도에 의한 제약과 세습적 특권이 존재하는 일본에서 이런 유교적 이상을 따르는 것은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지만, 도쿠가와 시대의 평화는 유교의 여러 요소들이 사회의 권위구조에 기여할 수 있는 유리한 여건을 제공했다. 그러나 일본에서의 유교는 불교의 승복을 입고 처음 등장했다. 따라서 유교적 가르침에 사찰로부터 독립된 역할을 부여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무가사회의 상류층 사람들 사이에서 ‘유학자(주샤)’는 고문과 교육자로서 엘리트 기구의 일원이 되었다. 유학자는 대개 적당히 평범한 집안이나 그보다 신분이 더 낮은 집안 출신 사람들이었다. (능력은 있으나 무사 사회의 주변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 이들이 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유능한 인물 통치를 옹호한 것은 지적 신조뿐 아니라 개인적 좌절감을 반영한 것임에 틀림없다. 다이묘의 고문으로 종사한 유학자들은 자신의 도덕적, 정치적 잠재력을 증진시키는 수단으로 유교 고전에 대한 지식에 정통해야 했다. 유학자들은 자신의 다이묘를 위해 문예교육 기획을 수행했고, 족보·법전·행정사례를 편찬했다. 그럼에도 이들이 자신이 섬겼던 현실 권력구조의 일부가 아니었다는 점은 중요한 부분이다.

3. 학자와 학문

-야마자키 안사이(1618~1682): 유교와 신도의 융합사상→고대 일본 연구 부활에 기여
-가이바라 에키켄(1620~1714): 도덕군자이자 영향력있는 효의 지침서, 여성교육 담론
-오규 소라이(1666~1728): 언어학, 문학, 사상, 법, 역사, 병법, 음악 등. 중국 것에 대한 열의. 소라이는 일본문화에서 큰 의의를 갖는 유학의 새 학파의 지도자였다. 당대 및 고대 중국어 공부, 고문사학 통한 고전 이해 노력. 쇼군 요시무네 위해 치유책 제시, 쇼군 쓰나요시 관련 지도적 역할. 그러나 그의 제안 중 실현된 것은 없었다.

결국 유학자들은 일본 사회의 현실에 불완전하게 기여했다. 위정자와 교육자들이 매력을 느꼈음에도 유교는 국가이데올로기가 되지 못했다. 무가사회에서는 반지성주의가 지속되었고, 책에 의존하는 학문이나 인자함보다 충성심과 용맹을 더 높이 평가했다.
고학파는 18세기의 상당기간 동안 대단한 지적 신망을 얻었으나, 파벌간 다툼과 반대파와의 논쟁이 난무하며 상황이 변했다. 이에 무사통치자들은 학문에 규제를 가했다. (마쓰다이라 사다노부 1790년 ‘이학(理學)’ 금지령)

4. 중국이라는 문제

초기 유학자들은 일본과 중국의 전통이 완전히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하야시 라잔: 신도를 ‘왕도(王道)’와 동일시했고, 일본 신화를 신유학의 우주론에 끼워맞춰 유학과 신도사상 간 일치 시도)
-고대 중국은 18세기 중국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만주족 지배 아래) 종교와 정치를 결합한 ‘일본의 도’는 중국 정복왕조들보다 고대 중국 성인 지혜에 더 잘 부합하며, 정치·경제면에서 동시대 중국은 이류다.(소라이 제자 다자이 슌다이)

다른 유학자들은 일본적인 것에 대한 확고한 자부심을 이끌어냈다. (야마가 소코 “무사도”)
미토 번에서 발전한 국학과 유학이 혼합되면서 이런 일본 중심적 사상을 확립하는 길이 19세기에 마련되었다. 그 무렵 중국은 서양에게 추월당했다. (아이자와 야스시 1825 ‘신론’에서 일본을 ‘중화의 꽃’이라고 말함) →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학이 천황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기 위해 왜곡되었다는 것이다. 일본의 특수성은 사무라이의 고결함이 아닌 천황가의 연속성에서 나오게 되었으며, 신화와 종교는 정권과 정치에 봉사하게 되었다. (‘미토학’)

5. 국학

국학은 유학을 중심으로 하는 ‘한학’에 대한 의식적 저항을 배경으로 발전했으며, 일본과 일본문화의 우월성을 주장했다. 이는 17세기의 고전연구와 함께 시작되었으나, 19세기 초에는 강력한 정치적 메시지까지 담게 되었다. 학문적으로 국학은 당시 다른 사상운동에 부속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국학 창시자들의 첫 번째 관심사는 초기 일본문학, 특히 시였다. (자연에 대한 환기와 감정에 대한 찬미.)

-가다노 아즈마마로 (1728년 경 쇼군 요시무네에게 교토에 학교 허락 청원)
국학의 가르침은 빠르게 퍼졌고 광범위한 집단의 학생들이 일본의 문화적 통합을 입증했다.
-가모노 마부치(1697~1769): ‘국의고’에서 중국 전통 정면 공격
-모토오리 노리나가(1730~1801): 국학은 불교나 유교처럼 사람을 개조하려 드는 대신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문학 연구의 목적은 ‘모노노아와레’(사물의 정념이나 비애에 대한 동정의식을 뜻하는 용어)

-히라타 아쓰타네(1776~1843): 국학은 신도와 확고히 연계되었고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히라타에 의해 국학은 종교적·정치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고대의 기원과 고대의 마쓰리고토(제정일치)를 새롭게 강조했다. 이런 고대의 개념에서 신의 후손이란 후광에 힘입어 인민을 다스리는 존재는 바로 천황이었다. →19세기 메이지국가에 기여한 미심쩍은 공헌 중 하나.
히라타의 저작에 나타난 국학의 중요한 한 특징은 그의 영향력이 일본의 광범위한 농촌지역에 뿌리를 내렸다는 점이다.

18~19세기 일본의 국학 전통은 역설로 가득 차 있다. 국학은 고학에서 시작해 문헌학적 엄밀성을 갖춘 많은 연구 성과를 낳았으나, 국학의 지도자들은 황당무계한 주장의 무비판적 수용을 옹호했다. 국학은 태고의 일본이 간직한 진실함이 외국, 특히 중국사상에 의해 오염된 것을 개탄하는 한편, 유용해 보이는 외국 사상은 무엇이든 원래 일본 것이라고 천연덕스럽게 주장했다. 이렇듯 외국사상을 자기 입맛대로 취하는 경향은 외국인에 대한 경멸과 결합되었다.

6. 난학 또는 양학

18세기에는 전문화된 특별한 하나의 학파가 나가사키를 통해 스며든 양학의 명백한 실용성과 합리성에 반응을 보이며 발전해 나갔다. 난학(란가쿠)은 의학과 함께 시작되었다. 17세기 유럽 의학은 신체 연구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직접 관찰, 초기부터 수술이 기본) 난학은 일본의 일부 교양인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져 나갔다.
-나가사키의 통역조합
-에도의 의사 집단: 중국 의학지식에 서양의 일부 수술기술을 추가하는데 흥미 가짐. 책에 의존한 연구.

(1771) 스기타 겐파쿠- 나이 많은 여인의 사형집행 현장 감독 허락. 당시 학자들은 <타펠 아나토미아>라는 네덜란드어 해부학 책을 들고 있었음 → 네덜란드 과학 기술 서적 번역
이런 외국 학문의 새로운 물결은 중국학 지배에 반기를 들었던 국학의 이데올로기적 공격을 강화해주는 것이었다.

예술, 의학, 19세기 수학, 물리학 공통점은 정확성과 실용성 ↔ 신유학 세계의 보편적 원리에 부합하는 것이 서로 경합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제1세대 난학자들은 전통을 뒤엎지는 않았다. 이들의 중요성은 그 태도와 마음가짐으로, 난학은 중국 중심 세계관에 기초한 고전적 지식과 최대한 동떨어진 일련의 학문에 새로이 눈을 뜨게 해주었다.

7. 종교

초기 일본의 종교전통은 불교와 민간신앙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이들 모두 국가의 지침과 여러 학자들의 사상이 확산, 약화과정에 따라 큰 변화를 겪었다. 일본 사회에서 업, 환생, 금욕 같은 불교교리는 수백만 일본인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토대였으며, 불교는 권력구조와 긴밀히 관련돼 있었다. 사회의 최상층에 해당하는 공가는 승려의 위계와 밀접히 얽혀 있었다.

그러나 불교가 일본의 종교로서 존속되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원래의 활력을 상당 부분 상실하고 있었다. 일본 인구 대부분인 촌민 사이에서 불교는 조상숭배, 전조, 점, 인자하면서도 변덕스러운 자연에 대한 염려 등이 조합된 민간신앙과 뒤섞여 있었다. (혼합의 상당 부분이 신도라는 것을 구성)
또한 민간숭배도 넘쳐났다. 대다수가 지역에 기반을 두었고 참배객이 모여드는 장소에 집중돼 있었다.
-이세신궁 참배

불교, 민간신앙, 자연숭배, 참배여행이 혼합된 또다른 경우는 일본 농촌에 널리 퍼진 민간종교 슈겐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구마노와 요시노-밀교인 진언종과 관련)
여기서 막부는 다시 정지작업에 나서, 1613년 모든 ‘야마부시(입산수도자)’는 슈겐도 본산 두 곳 중 한곳에 귀속하도록 명했다.

8. 서민 교화

일본에서 서민 교화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연사들 중에는 선불교 보급에 앞장선 선승들이 있었다.
-이시다 바이간(1685~1744): 심학(신가쿠)의 출발점이 된 강연을 함. 도쿠가와 시대 최하층 이룬 상인이 다른 계층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생각해선 결코 안된다고 주장.
-데지마 도안에 의해 발전

심학의 중요성은 에도 시대 일본의 정신수양에 대한 추구가 사무라이 사회에서보다 서민 사회에서 더 특징적으로 나타났다는 걸 보여줬다는 데 있다. 일본인들은 자신의 ‘이기적’ 욕망과 계산을 억제하려 애썼으며, 성(誠, 마코토)에 대한 해설과 권고를 인내심을 가지고 경청했다. 봉건적 신분제와 법령의 제약에도 불구, 일본사회 내 모든 집단이 추구하는 가치들은 일치하게 되었고, 각 집단은 더 큰 전체에 기여하는 일의 중요성을 납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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