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 4/16 『인지자본주의』 8장 인지자본주의에서 시간의 재구성

작성자
bomi
작성일
2022-04-16 00:02
조회
389
공통진실찾기 세미나 ∥ 2022년 4월 16일 토요일 ∥ 손보미
텍스트: 『인지자본주의』 조정환 지음, 갈무리 pp. 275~295

8장 인지자본주의에서 시간의 재구성


<맑스와 시간>

맑스의 자본주의 분석은 시간을 둘러싼 투쟁에 초점을 맞추었다.
맑스의 분석에서 시간은 양적 ‘길이’로 나타나고 이것은 자본주의 현실에서 사람들의 경험과 부합한다.
나는 맑스의 분석의 주요 대상인 이 현실적 시간과 그 경험내용을, 근대 자본주의 사회가 시간을 조직한 특수한 방식이자 그 효과로 이해하려고 한다.
나는 우선, 현실적 시간을 구성하면서도 그것에서 독립적인 가능적 시간실체로서의 ‘때’에 주목하고자 한다. ‘때’는 잠재적 시간으로서의 영원의 한 동적 단면이다.
여기에서 나는, 구성능력으로서의 가능석 시간 및 잠재적 시간이 부르주아 사회의 현실적 시간형식에 미친 해체적 영향으로 인해, 시간의 재구성을 둘러싼 투쟁이 사회적 갈등의 초점으로 등장하고 있음에 주목하면서, 오늘날 자본주의의 인지화 과정 속에서 이 사회적 갈등의 지형이 어떻게 재구성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나는 비물질노동, 삶정치적 노동, 인지노동이라는 새로운 노동형태의 대두를 주목하면서 물질노동에서 비물질노동으로, 산업노동에서 인지노동으로의 헤게모니적 노동형태의 이행을 당대의 시간 재구성의 사회역사적 조건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1) 맑스는 왜 자본주의를 분석하며 시간을 둘러싼 투쟁들에 초점을 맞추었을까?
2) ‘가능적 시간’과 ‘잠재적 시간’의 차이는 무엇일까?


<공장노동, 형식적 포섭, 그리고 시간의 공간화>

공장은 근대에 탄생한 특정한 ‘곳’이다. 그것은 대지의 절단된 일부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자연에서 분리된 부지의 구축을 의미한다. 그것은 순환하는 자연, 즉 무시간으로부터의 시간을 독립적으로 구축한다. 이런 의미에서 근대적 의미의 시간은 공장에서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78)
노동의 시간은 영원으로부터의 절단이다. 영원은 자기반복하는 누승적 힘이다. 시간은 영원의 화살, 그 누승적 힘의 새로운 펼침이며 혁신적 드러남이다. 시간은 영원의 동적 단면, 즉 ‘때’이다. 영원은 ‘때들’을 통해 자신을 펼친다. 시간이 영원으로부터 움직일 때 영원은 이제 ‘때들’인 시간으로 구성된다. ‘때’는 영원이 현실로 펼쳐질 수 있는 시간, 즉 구체적 상황 속에서의 구체적 힘으로 나타나는 영원의 시간이다. (279)
노동시간은 힘으로서의 시간이 공간적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지속으로서의 노동시간에서 ‘때’는, 다시 말해 틈과 단절이며 새로움의 구성인 저 ‘때’의 시간은 낭비로 정의되며 제거되어야 할 것으로 정의된다. 노동시간은 활동력이 갖고있는 다질적 창조의 ‘때들’을 억압하면서 오직 그것을 하나의 목적론적 과제(가치생산)에 복무하게 한다.
삶의 시간인 ‘때들’과 삶의 공간인 ‘곳들’을 지속과 연장의 동일성으로 고정시키는 것은 권력이다. 공장은 권력 그 자체이다.
공장은 힘으로서의 영원을 위계적 배치에 종속시킴으로써 탄생하는 특정한 형태의 몸이다. 권력에서 영원은 높낮이에 종속된다. 권력은 ‘때들’의 수직적 배치이다. 권력은 영원의 ‘때들’을 노동력으로 조직한다. (280)
길이로서의 시간인 노동시간은 높이로서의 시간인 권력에 의해 조직된다. 공장은, 이 두 가지의 시간이 씨줄과 날줄로 합성된 몸이다.
척도는, ‘그 자체로는 측정 불가능한 시간’을 봉인하고 그것의 힘을 흡수하는 방식이다. 척도로서의 시간은 ‘때들’의 협력과정을 교환과정으로 만든다. (281)
잉여가치는 길이로서의 시간의 착취이지만 그것은 높이를 수단으로 달성된다. 잉여노동시간의 집적과 집중이 권력의 존재방식이다. 그리하여 삶은 높은 곳에 더 긴 시간이 집중된 불안정한 역 피라미드, 가분수의 모양을 취한다. (282)

3) 영원, 시간, ‘때’ 그리고 ‘곳’. 각각의 정의와 이들의 관계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4) 노동시간은 삶의 시간인‘때들’을 억압한다. 억압당한, 혹은 제거당한 ‘때들’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실제적 포섭에서 시간의 공간화>

경제의 테크놀로지인 테일러주의와 포드주의는, 권력의 테크놀로지인 사회(민주)주의와 케인즈주의에 의해 육성되었다. 그것들은 시간의 압축기술이다. 시간을 압축하는 일차적 방법은 기계화였다. 그것은 권력의 더 큰 집중, 즉 시간의 고도화를 통해 달성되었다. 이제 국가가 시간의 직접적 압축자로 나타난다. 국가는, 사회에 흩어져 있는 분산된 시간들을 모으고 그것들을 합성함으로써, 잔존하는 ‘때들’을 조밀한 시간의 계기로 포섭한다. 이것이 시간의 공간에의 실제적 포섭이다. (284)
시간의 공간에의 실제적 포섭은 더 많은 시간의 공간화를 수반한다. 공장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만 시간이 공간화되는 것이 아니라 공장 밖의 더 많은 삶의 ‘때들’이 공간화된다. 그리하여 사회 전체가 하나의 공장적 공간으로 전화하며 삶 자체가 노동시간으로 전화한다.
다른 한편 기계화를 통한 시간의 압축은 점차 더 많은 노동의 지성화, 서비스화, 정동화를 가져온다. 자본은 인간의 개체적 몸에 대한 포섭을 넘어선다. 그것은 지각, 정서, 지성, 상상의 힘이자 그 무엇보다도 행동의 힘인 ‘뜻’을 포섭한다. (285)

5) 노동의 지성화, 서비스화, 정동화 과장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285, 6)


<비물질노동, 가상실효적 포섭, 그리고 시간의 초시간화>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을 위한 시간의 밀도화, 즉 시간압축은, 역설적이게도, 시간을 영원의 한 계기로 통합한다. (286)
인지자본주의에서 근대적 공간구조는 흔들린다. 길이, 밀도, 고도로 짜인 물질적 공간구조물은 더 이상 견고한 기반을 갖지 않는다. 그것은 출렁이는 ‘때들’의 소용돌이 위에서 불안정한 동요를 겪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가장 먼저 허물어져 내리는 것은 길이의 축이다. 인지적 비물질적 노동에서 노동은 연속으로서보다는 오히려 접속으로 나타나고 그 때문에 더 이상 노동의 지속시간에 의해 측정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가치법칙은 근거를 잃고 동요하며 자신을 법칙으로 세우기 위해 정치적 기억의 힘에 더욱더 크게 의탁하게 된다. 노동을 상기시키는 많은 법적 제도적 장치들이 위태롭게 된 가치법칙을 호위한다. 연속을 결정하는 것으로서의 기억은 항상 권력의 기능이다. 이때 가치는 이제 측정과 척도의 기능이 아니라 권력과 명령의 기능으로 나타난다. (287)
제국은, 영원으로부터 시간의 절단이 아니라 ‘때들’의 공통성, 즉 영원 자체의 포획을 겨냥하는 권력이다. 그것의 본질은 공통적인 것에 대한 전쟁의 지구화의 영속화이다. 영원에 대한 포획은 더는 역사의 이름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역사의 종말이 선언된다. 진보의 관념이 기각되고 구원의 관념이 부상한다. 근대 전쟁의 암호명이 진보였다면 탈근대 전쟁의 암호명은 구원이다.
다중은 시간의 화살들, ‘때들’이며 그 ‘때들’의 떼이다. 다중은 연장 속에서 통일된 몸 형태를 거부하면서 새로운 유형의 몸을 찾고 있는 특이한 살이다. 다중은 시공간적 동질성에 의해 구축된 노동계급과는 달리 다질적으로 움직인다. (289)
인지자본주의적 상황에서 재현과 매개, 그리고 표현의 가능성은 전혀 새로운 조건하에 놓이게 된다. 이제 이 조건에 걸맞은 방식으로 공통세계를 상상하고 실천적으로 구축하는 것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진보는 더 이상 이 가능성을 재현하고 표현할 수 있는 적절한 개념이 아니다. 이것은 결코 어떤 진보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290) 그것은 우리가 매우 단순한 동거형태로부터 훨씬 더 충만한 동거형태로, 더욱더 많은 요소들이 고려되어야 하는 넘쳐흐름의 동거형태, 넘쳐흐름의 ‘것들’로 이행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국은, 다중의 이 넘쳐흐름을 뒤쫓는 주권의 재배치라는 점에서, 다중에 의해 불러내어진 주권형태이다. (291)

6) 가치법칙의 근거가 척도에서 명령으로 바뀌고, 지배적 관념이 진보에서 구원으로 바뀐 이유, 조건들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인지노동, 삶시간, 그리고 구성>

인지노동은 분리된 단위 시간으로 측정될 수 없다. 인지노동은 실재적 공통성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노동과정이 공통적 삶에 기초하는 한에서, 투쟁은 공통적 삶을 둘러싸고 전개된다. 그것은 삶권력과 삶정치의 갈등이다. (291)
인지자본주의 하에서 갈등은 직접적으로 공통적 영원, 생태적 우주를 둘러싸고 전개된다. 문제는 더욱 근본적인 곳에서 제기된다. 인류와 생명은 계속 진화할수 있을 것인가? 그러려면 어떤 생명, 어떤 생태를 구축해야 하는가?
이 문제에 직면하겨, 우리가 탈근대적 운동과 사유들 속에서 즉각 발견하는 것은 시간에 대한 반동이다. 한편에서 이것은 고토화와 밀도화를 수반하면서 선형적 진보를 표상해온 근대적 시간관념에 대한 하나의 거부를 표현한다. 다른 한편에서 이것은 시간의 부정, 시간의 초시간화, 초시간적 영원에로의 귀의를 표현한다.
시간의 공간화에 대한 저항이 초시간적인 것에 의지할 때, 저항력은 취약해지고 심지어 고갈된다. 다중의 잠재력을 생산적으로 폭발시킬 수 없는 저항과 운동은 결국 제국의 논리에 포섭될 수밖에 없다. (292)
영원을 포획한 제국이, 마치 자신이 단 하나뿐인 영원이자 공통인 것처럼 위장한다. 제국은 그 자신을, 현실적인 것을 규정하는 잠재적인 것인양 내세운다. 이것이 바로, 제국이 창출하는 가상현실이며 가상실효적 포섭의 형식이다. (294)
구성의 시간에서 삶의 ‘때들’은 직접적으로 정치적이다. 다중은 삶정치적 구성의 시간의 화살들, 그 특이한 ‘때들’의 떼이다. 다중의 특이한 ‘때들’을 통해 영원은 부단히 새로워진다. 구성적 ‘때들’은 새로운 시작의 새간이며 영원을 부단히 새롭게 한다는 의미에서 발생적 역사 그 자체이다. (295)

7) 영원을 초시간화하며 다중의 잠재력을 가로막는 사유 양상들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293)
8) 영원의 초시간화, 영원에 대한 신비화가 제국의 논리에 쉽게 포섭되는 이유는 무엇일까?(29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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