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식민이성 비판> 3장. 역사

작성자
bora
작성일
2023-06-03 21:54
조회
192
가야트리 스피박 <포스트식민이성 비판>
3장. 역사



>> 인트로

역사적인 개인의 발굴, 검색, 그녀에게 다가가려고 애쓰는 노력은 우리의 출발점에 있는 이중구속 내부(제1세계 안에 있으면서 제1세계의 제국주의적 기획을 비판한다는 것)에서 씌어진다. 또 우리가 타자를 들을 수 있다고 결정할 때, 언제나 거기 버티고 있는 비결정적인 것(끝까지 말해지지 않은 채 남는 것)도 위험부담이 된다.
그러나 오늘날 전 지구의 금융화를 도모하기 위한 북(north)의 바운더리 안에서 남(south) 출신의 여성은 대상이자 중개자로서 특별히 특권화된 기표가 된다. 그녀는 시장에서 선호되는 행위자이자 초국가적 자본을 전 지구화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 지구적인 남을 둘러싼 “세계구획”(worlding)의 대안적인 지리를 지적해야 한다.



>> 문서보관소 자료의 인식소적 폭력

인식소적 개조(서구의 법률, 이데올로기 등을 통해 “토착민”을 서구인의 자아를 공고하게 하는 타자로 만들어내는 것)가 일어나고 “문학적인” 것과 “식민적인” 것 사이에 친밀한 관계가 확립되던 시기에, 문학 읽기는 역사기술을 쉽사리 대리보충할 수 있다. 따라서 내게 문학과 문서보관소는 서로 공모하는 것으로 보인다. 거기서 저자의 권위는 ‘진리의 공식적 후견인’이 통제하는 대로 맞춰진다.
* 제국주의 기획이란 (타자에게는) 역사의 거의-자아화된 타자로서의 식민주체를 “의미하고” (자아에게는) 그러한 식민주체를 “아는” 인식소를 폭력적으로 한데 모으는 것이다. 이것은 ‘기획’된 서사인 만큼 우리가 알아볼 수 있다.

영국 <동인도회사>에 남은 몇 편의 편지 분석 :
1) 총독의 부대리인이 쓴 편지 : 인도를 돌아다닐 때 그곳의 낯선 자인 자신을 정보의 주권적 주체로, 행위자를 도구로 설정하고 있다.
2) 의회 총독 대행이 쓴 편지 : 토착민 왕의 권리를 강제적 책무로, 행위자를 제국주의적 농노의 정형으로 재각인하고 있다.
3) <동인도회사> 총독부가 어떤 편지에 개입한 정황 : 자신들의 권력 욕망을 법, 교육, 종교 등으로 위장 발급하고 있다. 익명적인 대행자로서.
즉 문서보관소 기록들은 인도 토착지대 산악 국가들의 “참된” 역사를 생산하는 데 일조한다.



>> 문서보관소 자료가 서발턴 여성에게 가한 인식소적 폭력

지금까지 문서보관소 자료의 사소한 대목들에서 가치 변환하는 담론적 변동을 살펴보았다. 프로이트의 “중층-결정”(over-determination) 개념에 빗대어보면 이해하기 쉽다. “중층-결정”이란 (어떤 것이 의도된 하나의 원인이 아니라, 여러 복잡한 계기에 의해) ‘다른 식으로 결정되는’ 것을 뜻한다. 예컨대 꿈-텍스트에 나오는 이미지들은 소망-충족과 (이해관계를 은폐하는) 작업(work)이라는, 두 개의 독립적인 계기에 의해 ‘다르게 결정된다’. 이는 의식 출현의 철학적 계기들과 유사해 보이며, 따라서 제국의 제국주의적 재현만큼이나 이질적인 하나의 ‘꾸며내기’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원래 동인도에서 무역하던 <동인도 회사>는 그러한 상업적인 관심사에서 영토적인 관심사로 점차 옮겨간다. 임시변통의 방식으로 나름의 정치영역을 확립한 의사-국가적 실체가 된다. “하나의 토착정부가 설립된다면, ... 토착정부가 영국정부와 맺는 봉건적 관계와 양립할 수 있는 것이며, 영국정부가 신민이 보는 앞에서 토착정부에 책임을 부여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봉건적 담론에 호소하기에 이른다. 이는 토착민들이 ‘영국이 영토 침범을 통해 상업적 독점을 하겠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무능력 혹은 인식하지 않겠다는 거부에 의해서도 지지된다.
한편 <동인도회사>의 한 인구학적 기록은 인도의 백성(people)이 “다양한 종류의 선주민들”이고 적법한 군주가 힌두교 추장이라고 쓴다. 그런데 이 “선주민 주체들”이 자유 임금노동과 소비주의 훈련을 통해 변화되기를 바란다고 쓰면서, 힌두교 추장들에게만 권위와 보증을 부여한다. 이러한 권위 부여의 이데올로기적 만개-인종 담론의 분할적 전개-는, 제도권 ‘연구’ 역시 교육과 법의 영역에서 계획된 인식소적 폭력에 부합하게 됨을 보여준다.
이러한 배경을 참조할 때, 즉 계기들로 삼을 때, 당시 인도에서 벌어진 일들은 어떻게 ‘다르게 결정되’어 문서보관소 자료에 남았는가?

인도 토착지대 산악 국가 ‘시르무르’에서 일어난 일에 관한 기록 :
<동인도회사> 문서보관소 기록에 따르면 시르무르의 라자(=왕)가 영국인들에 의해 폐위된다. (표면적으로) 그의 야만성, 방탕함 때문인데, 이에 따라 (친영파에 의해) 어린아이인 왕세자와 그의 후견인 라니(=여왕/왕비)가 통치권을 갖게 된다. 시르무르의 땅은 차츰 영국에 병합된다.
이러한 기록 덕분에 우리는 라니를 ‘무너져 가는 궁궐에서 가부장적이고 방탕한 남편의 권위로부터 떨어져나와, 그곳을 점령한 백인 남자에 의해 관리당한’ 인물로 상상하게 된다. 그러나 이 역시 세계구획이라는 인식소적 폭력의 일부이다. 토착 공간에서의 “참된” 역사에 외국인 행위자가 갑자기 출현하기 때문이다. 또한 라니는 가부장제와 제국주의 사이에서 막다른 곤경에 처하고 만다. 즉 그녀는 봉건에서 근대로의 교체가 일어나자 자신의 신민-자녀의 대리인으로서만 의미 부여된다.
결국 라니는 영국인들의 횡포에 자신이 처한 가부장적 구성체 내부로부터 응수하고자 사티가 되겠다고 선포하는데, 그조차 허용받지 못한다. “의회 총독의 동의 없는 시르모어(시르무르를 영국인 마음대로 읽음)로부터의 라니의 제거를 막을 것입니다.” 이를 위해 폐위된 라자가 너무 멀리 추방되는 것이 미루어지고, 문서보관소 기록에서 그 문제는 차츰 흐지부지된다.

나는 이 (기록의) 일상성을 숙고해보고 싶다. (‘다르게 결정되어’) 역사라는 분과학문에 숨겨진 부분들로 인해 과연 어떤 것이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게 되는가를 묻고 싶다. 그러한 작업은 서구가 만들어낸 이성적 논리가 해내는 것의 한계를 재현하는 것이다. 논리적 수사의 폭력적 한계를 차단함(끊어냄?)으로써 말이다. 염두에 둘 것은 누구도 이 한계를 “제시”(present)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재현”(represent)할 뿐이다.

나의 문제의식은 역사적 리얼리즘의 구현이 아니라 역사적 현실의 재현물들을 어떻게 꾸며내는가에 있다. 문서보관소에서 라니는 자본의 식민주의를 위해 강요된 대행자/도구/목격자로서 필요할 때 소환되어야만 나타나는 존재였다. 나는 이러한 논지를 분명히 하기 위해 몇 년 전 내가 했던 판단들(<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을 다시 불러오겠다.
* 내가 페미니스트 문학비평가로서 무언가를 읽을 때 취하는 신중한 해체론적 방법은 연구자 자신의 공모성을 고려하는 것이며, 비판적 사유에 합치되는 거리두기만을 행하는 것이다.



>> 제1세계 지식인의 인식소적 폭력

- 푸코와 들뢰즈에게 주요한 전제는 주권적 주체 비판. 그러나 들뢰즈의 오어법적 표현인 “욕망”, “전 지구”, “기관-없는-신체”로서 전 지구적 표면은 (제국주의와 연관된) 경험적·계보학적 옛말 사용에 오염. 푸코의 작업도 하부-개인적인 것과 커다란 집합적 장치들에 전념하면서 (경험 속에서 우러난) 이데올로기 이론의 관점을 거부. 포스트구조주의 지식인들은 서발턴들을 ‘대표’한다고 하면서 자신들을 투명한 존재로 ‘재현’. 즉 국제적 노동 분업에서 착취자의 편.
- ‘대표’와 ‘재현’ 구분해야. 맑스의 글에서 읽어낼 수 있음: 소자작농계급 의식은 그것을 담지하는 사람을, 다른 계급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듯 보이는 “대표자”에게서 발견함. 이것은 묘사하는 게 아니라 대체해버리는 것. 오늘날 계급이 아닌 젠더 쟁점을 생각해도 마찬가지 현상. 그렇게 서발턴 여성이 은폐되면서 전 지구의 금융화가 이루어짐.
- 오늘날 맑스주의자로서 급진적 실천을 하려는 지식인이라면 (푸코와 들뢰즈처럼) 권력과 욕망 개념을 총체화함으로써 개별주체를 다시 도입하기보다 대표라는 사건이 묘사로 행세하는 것의 문제, 즉 대표/묘사의 이중적 회합에 주목해야. 데리다의 말을 빌려, 경제적인 것을 “삭제하에” 두면서도 환원 불가능한 것으로 보아야.



>> 억압받는 민중 가운데 진정한 서발턴이란?

- 힌두법의 코드화로 이루어진 인식소적 폭력. 푸코와 들뢰즈는 착취의 지도를 고려하지 않으면서 도대체 어떤 “억압”의 틀에 민중을 놓을 것인가?
- 인식소적 폭력이 그려내는 회로의 주변부에 있는 문맹인 농부, 선주민, 도시 하부프롤레타리아 중에서도 최하층 남자들과 여자들. 푸코와 들뢰즈는 어떻게 이들에게 기회가 주어져 자신이 처한 조건을 알고 말하고 연대할 수 있다고 보나? 오늘날 메트로폴리스의 “제3세계 페미니즘”도 마찬가지.
- 인도 <서발턴 연구회>는 제1세계 지식인들의 토착정보원. 민중이 아니라 지역의 엘리트라는 부유하는 완충지대, 민중이나 서발턴이라는 이상(ideal)에서 벗어난 일탈 집단을 조사했을 뿐. 이 집단은 (맑스의 분석대로) 비교적 열등한 사회계층에 속하면서도 지배 집단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종속된 부류. 부바네스와리도 계급 아닌 젠더의 차원에서 여기에 해당.
- “진정한” 서발턴 집단 중에 자신을 알고 말할 수 있는 서발턴 주체가 있음. 문제는 재현하는 지식인에게 서발턴 삶의 맥락이 끈기 있게 추적되지 않는다는 것.
- 제국주의적 기획에 의해 서발턴 주체가 말소되는 여정 내부에서 성차의 궤적은 이중으로 지워짐. 식민주의적 역사기술의 대상이자 반란의 주체로서 남성지배를 유지시키는 젠더의 이데올로기적 구성 때문.



>> 새로운 서발턴 출현

- 우리 시대의 전 지구적 자본주의와 국제적 노동 분업. 소위 탈식민화, 다국적 자본의 성장, 행정 부담의 감소 속에서 이제 식민대상의 “발전”은 힌두법/교육의 코드화 따위가 아니라 소비주의 제한으로 이루어짐. 최소한의 생존 요건과 값싼 노동력이면 됨.
- 비조직 혹은 영원한 여성노동은 이제 세계무역의 대들보. 특히 ‘남’에서 제일 가난한 여성들. 이들에게 지구적인 것과 지역적인 것 사이의 경계는 미결정적. 과거 인도의 민족주의적 서발턴과 다른 기반.
- 이 집단과의 대면은 전 지구적으로 존재하는 그들을 대표하는 것일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을 묘사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 동시에 “자연스럽게 똑바로 말하는” 억압의 주체를 상정하는, 타자로서의 제3세계를 전유하고 재기입하는 제1세계 지식인들에게 의문을 제기하는 것.
- but 전 지구적 제휴 정치의 그럴듯함에 대한 믿음은 ‘북’에 잘 자리 잡은 ‘남’의 디아스포라들 사이에 만연. 또한 개발도상국에서 “국제적 페미니즘”에 관심 있는, 지배적 사회그룹의 여자들 사이에도 만연.
* 지역화된 저항 프로그램을 보편적인 양 언급하는, 그리하여 주체의 특권을 취하고 유토피아주의에 빠지는 들뢰즈와 푸코의 ‘인가된 무지’ vs 식민주체의 제국주의적 구성에 토대가 된, 근대 글쓰기의 유럽적 과학에 배어 있는 자인종문화중심주의를 밝히고 비판한 데리다.



>> 서발턴의 지속적인 구성을 위해 엘리트가 해낼 수 있는 것은?

- 모든 페미니즘 혹은 성차별주의 반대 기획이 (여성 + 인종, 민족, 계급 문제인) 서발턴 여성문제로 환원될 수는 없음. 그러나 서발턴 여성문제를 무시하는 건 인종 no! 민족 no! 를 외치는 남성주의적 급진주의와 협력하는 정치적 제스처.
- 서발턴 여성문제 논의는 상실된 기원을 찾는 “본질주의”로 빠지면 안 됨. “실증주의”를 비판하며 이론을 보강한다고 될 일도 아님. 아무튼 어느 정도의 실증주의와 구체적인 것의 탈물신화를 통한 작업이 필요. 이 방법 가르쳐준 서구 이론가들을 계속 의심하면서.
-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어린아이가 매를 맞고 있다”는 환상은 ‘아버지가 나를 사랑한다’는 소망이 무의식에서 발현된 것. -> 프로이트는 자기 마음대로 타자 주체와 그에 대한 지식을 기입함. 그것도 궁극적으로 여성의 남근 선망을 드러내기 위해. -> 분과학문이라는 건 죄다 이런 불가능한/폭력적인 변형 작업을 하고 있음. 분과학문 안에 있는 우리는 이런 이데올로기적 구성체에 가담하고 있음을 “깨달으면서 벗어나야”(unlearn) 함. -> 내가 서발턴 여성문제 논의를 위해 “백인종 남자가 황인종 남자에게서 황인종 여자를 구해주고 있다”는 문장을 던질 테니 그 문장의 불가능한/폭력적인 변형 작업을 함께 “깨달으면서 벗어나”보자.
* “어린아이가 매를 맞고 있다”는 환상에 담긴 억압 = 여성의 남근 선망. 그 역사를 진술하는 프로이트 vs “백인종 남자가 황인종 남자에게서 황인종 여자를 구해주고 있다”는 문장에 담긴 억압 = 서발턴 여성의 소외. 그 역사를 진술하는 우리 feat. 맑스주의 서사
* “어린아이가 매를 맞고 있다”는 환상에 관한 억압의 역사를 말할 때 프로이트는 이중의 ‘기원’을 찾아감. “백인종 남자가 황인종 남자에게서 황인종 여자를 구해주고 있다”는 문장에 관한 억압의 역사를 살펴볼 때 우리도 이중의 기원을 발견하게 됨.



>> 가부장제와 제국주의 사이에서 사라진 서발턴 여성의 사례

- 죽은 남편을 화장하는 장작더미에 올라가서 자신을 희생하고 파괴하는 힌두 과부 전통. 이에 관한 두 진술은 서로를 합법화해주는 오랜 역사를 가짐: 제국주의 “백인종 남자에게서 황인종 여자를 구해주고 있다” vs 힌두 가부장제 “여자들이 (스스로) 죽기를 원했다”
- 기원1 : 여성(오늘날 “제3세계 여성”)의 보호가 ‘좋은’ 사회(“문명화 사명” 혹은 “젠더와 발전”)를 확립하는 데 필요한 기표가 된다는 사실. 당시 영국인들은 식민지 인도를 좋은 사회로 확립하기 위해 사티를 범죄로 재정의. 이런 ‘좋음’의 신념과 실천은, 제국주의 기획이 독점하는 인류의 일반적 역사/생산양식 서사(상업->영토/봉건주의->자본주의) 컨셉에 따른 것.
- 기원2 : 일반적인 경전의 교리에 따르면 자살은 비난받아 마땅. but 힌두 경전에 따르면 사티는 규칙의 예외, 인가된 자살. ‘죽은 남편의 장작 위에서 그에 대한 열정과 헌신을 증거하며 죽는 것’은 진리-지식과 신성한 장소의 한 가지 버전(사실 시뮬라크럼)이기 때문. 결국 그 행위는 여성의 자유롭고 주체적인 선택이라며 찬양받음(사실 이데올로기화).
- “한 편의 합법성이 다른 편의 합법성 결여를 함축하지는 않는다.” 역사적으로 합법성은 물론 추상적인 제도권 권력에 의해 확립. 결국 삶에서의 여성 주체 형성은 디페랑의 장소. 이것이 가부장제와 (제1세계가 말하는) 발전 사이에 오늘날 서발턴 여성이 처한 상황.
* 충분히 가스라이팅 당해서 ‘행복한’ 사티도 있었을 것. 영국인도 식민 지배 초기에는 힌두 가부장제와 협력하느라 사티를 봐줌. 힌두 교리의 일반법이 과부는 퇴행해야 하는 존재라고 규정. 이런 사실들이 당대 서발턴 여성 주체 복원의 불가능성을 계속해서 중층결정.
* 일단 ‘존재하다’, ‘진’, ‘선’, ‘정’을 뜻하는 사트에 비해 그 여성형인 사티는 ‘좋은 아내’만을 뜻하는 게 문제. 그런데 영국인들이 이 말을 과부의 자기-파괴희생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씀. 황인종 여자를 황인종 남자에게서 구하겠다면서 좋은 아내 됨 = 자살이라 하는 건 담론적 실천 속에서 황인종 여자들에게 더 큰 이데올로기적 억압을 가하는 것. 이것도 인종-계급-젠더 중층결정.
- 가부장제와 제국주의 사이에서, 주체구성과 대상형성 사이에서 여성의 모습은 격렬한 진동 속으로, 전통과 근대화 사이에 사로잡힌 “제3세계 여성”이라는 잘못된 형상화 속으로 사라짐.
- 푸코가 말하길 ‘억압’은 법의 ‘금지’와 다르게, 사라지라는 것을 넘어 아예 없었던 셈 치라는 것. but (내가 이렇게 연구해놨으니) 역사 기록 속에서 사티는 주체(법)와 지식의 대상(억압) 사이의 이런 대립을 해체하며, 침묵도 비실존도 하지 않고 “사라진” 자리를 가리킬 것.



>> 아웃트로

- 포스트모던 자본 하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이 “올바른” 저항에 매개된 접근밖에 할 수 없다면, 주변부의 역사에서 나온 사티 이데올로기가 개입주의적 실천의 어떠한 모델 속으로 지양될 수 있을까? 일단 상실된 기원에 대한 향수는 대항 but 헤게모니적 이데올로기 생산을 일으킨다는 의심이 들어서 안 됨.
- 부바네스와리 바두리의 자살 : 생리가 시작되기를 기다려 자살함으로써 과부에 대한 금기를 역전 -> 자신의 육체를 여성/글쓰기의 텍스트로 바꾸어 “말하기”를 시도 -> but 후대의 누구도 이 목소리를 듣지 못함.
- 앞에서 언급한 라니 역시 우리에게 말 걸지 못함 : 토착 가부장적 역사는 그녀의 장례식 기록만 남겼으며 영국인의 식민주의 역사는 때때로 부수적인 도구로서 그녀를 필요로 했을 뿐이므로.
- 이런 상황에서 이 글의 목적은 식민당국의 침묵을 비난하는 게 아니라, 당시 인도 서발턴(에 가까운) 여성들보다 더 해방된 오늘날 여성들의 침묵을 지적하는 것. 특히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 메트로폴리탄 학계 여성들과 전 지구적 금융화 프로그램에 잘 편입된 남(south) 출신 디아스포라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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