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1 『포스트식민 이성 비판』 4장 문화 - 발제문

작성자
chu
작성일
2023-06-21 18:50
조회
275
4장 문화

현재의 역사, “우리 문화”를 살펴보자. 1980년대의 주요 논쟁 텍스트였던 프레드릭 제임슨의 포스트모더니즘론을 경유하여 “우리 문화” 속으로 들어가 보자.

* 포스트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혼융 문제
- 하버마스-료타르 논쟁(모더니즘 옹호-포스트모더니즘 주창)->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구조주의 융합에 공헌-> 이는 문화사에 대한 사심 없는 설명이라기보다 문화적 생산으로서 문화사라는 서사의 메타비평적 생산에서 일어난 하나의 부수적인 사건일 수도 있다.
- 혼융의 대표적 예, 제임슨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자본주의의 문화논리」에서의 모순
① “우리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일상에 의해 내포되는 주체-입장을 지워버리려는 욕망. 여기서 말하는 주체-입장이란 포스트모던 문화의 지배류를 논평하여 급진적 평판을 얻은 저명한 미국 인문학 교수들. 문화 지배류의 권력-분석은 부상중인 이질성의 억압을 가시화할 수 밖에 없다. 이질성을 중지시키고 싶어하는 제임슨의 욕망. “포스트모더니즘” 생산하기.
“포스트모던한 것은 매우 상이한 종류의 문화적 충동들 – 문화적 생산의 ”잔여적“형식과 ”부상중인“ 형식(레이먼드 윌리엄스)-이 나름의 길을 닦아나가야 하는 세력 장이다. 우리가 문화적 지배류의 다소 일반적인 의미를 성취하지 못한다면 현재의 역사를 얄팍한 이질성으로, 무작위의 차이로, 효율성을 결정할 수 없는 변별적인 일군의 힘들의 공존으로 보는 관점으로 떨어진다.”
② 초국가적 지식능력(literacy). 후기자본주의 혹은 포스트모던 자본주의에서는 모든 것이 문화적인 것이 되고 그렇게 보이기 때문에 경제적인 것은 지워지고 없는 것 같아 보이는 현상을 유지시킨다. 그렇지만 초국가적 지식능력은 이질성을 무시할 수 없다.
문화적인 것을 이렇게 표현해 보자. 문화적인 것이 추상 일반을 재코드화할 수 있고, 초국가적 지배류가 “우리의 사회생활에서 모든 것”을, 또 그들의 사회생활에서 모든 것 “문화”로 쓸 수 있다고 말이다. 우리가 보기에는 지배 문화인데, 그들이 보기에는 이질성과 문화 상대주의이다. 이후 나는 “문화”라는 단어의 용법에 나타나는 유명론적, 이론적 실천을 메트로폴리탄 시민 사회들에서의 하층계급 다문화주의로부터 배울 것을 제안할 것이다.
③ 제임슨의 설명처럼 포스트모더니즘은 전적으로 새로운 것인가? 제임슨은 문화적인 것과, 생산양식 및 스타일들 사이의 관계를 동형적인 예들로 다룬다. 리얼리즘,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시기구분에서 문화양식-가치생산양식들은 동형을 이룸.(리얼리즘, 모더니즘-이전 가치생산양식 / 포스트모더니즘-다국적 자본) 고흐의 농부 신발 그림과 앤디워홀의 구두 작품 사이 대조는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각 작품이 그리고 있는 대상은 형태학적으로 다를 바 없다.
④ 제임슨은 포스트모던한 것을 표면상 균열로, 효과상 반복으로 이론화한다. 그의 글이 지닌 설득력은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한다. 반고흐, 워홀, 뭉크와 마주하거나 보나벤츄라를 서성일 때, 사실 그는 일반적인 미국 이데올로기적 주체의 추론된 경험 위에 자기 논의의 토대를 두고 있다. 제임슨의 분석은 포스트모더니즘 속에서 사라지는 미국주체를 증명하기보다, 저 낡고 후진 것, 즉 정체성의 상실을 느끼는 포스트모던 하이퍼-공간 속에 있는 주체의 현존에 매달린다. 모던한 것의 전도된 형태로서 포스트모던한 것은 모던 담론을 반복한다.

- 제임슨이 포스트모더니즘을 균열이라 확증하는 가장 흥미로운 책략들 중 하나는 해체를 전유하는 방식.
제임슨에게 본보기가 되는 포스트모던 이론가 데리다(에크리튀르, 텍스트성, 탈중심화된 주체) 문자소적 구조의 억압,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고 자기-현존적이지-않으면서 기원에서 시작된 것과도 다른 무엇인가의 흔적. 모든 사상과 행동의 시작에 깃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문자소적 구조는 글쓰기와 같은 구조이다. “문자소적”(graphematic)에 들어있는 “문자”(graph, 글쓰기)는 해체에서의 모든 개념-은유들처럼 하나의 오어법이자 (개념적으로) 그릇된 은유이고/이거나 (은유적으로) 타협된 개념이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주체”가 갖는 개인의 의미는 문자소적이고 오어법적이다. 인간 존재는 이렇게 문자소적 구조의 가정을 교묘하게 처리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사유한다. 영미권 비평가들의 주체의 탈중심화 서사-데리다의 영향.

- 제임슨은 포스트모던한 것이 전적으로 새로운 “경험”이라고 주장하고 싶어서 맑스주의적 도덕주의를 잊어버리며 아무것에도 책임지지 않게 된다. 제임슨의 맑스 읽기.
‘맑스는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을 하라고, 즉 이러한 발전을 긍정적으로 또 부정적으로 양면에서 생각해 보도록 강력하게 촉구한다.’(451) 자본주의를 긍정적인 동시에 부정적으로 사유하기 위해 맑스에게서 하나의 알리바이를 찾아낼 수 있다는 읽기의 층위는 평소 제임슨의 복잡화 자세와 부합되지 않는다. 제임슨은 다국적 자본의 다국적 결과에 주목하지 않은 채, 다국적 자본주의를 마술적으로 환기하는 측면을 갖는다. 제임슨은 “다국적 자본주의”를 전략적으로 환기함으로써 자신을 맑스주의의 도덕주의와 차별화한다.
- 피럴먼의 시. 차이나타운에서 본 한자. 피럴먼이라는 백인 산책자는 차이나타운을 거닐며 중국어의 풍부한 의미화 실천을 삭제하고 전유한다. 그런데도 그의 삭제와 전유는 신중하게 기록된 지배적인 역사의 서사에 속하지 않는다고 한다. 지시대상으로서 “중국”은 차이나타운이라는 혼종체를 숨기고 있으며, 또 다시 차이나타운은 문화적으로 표나지 않는 앵글로적인 것으로부터 숨겨진다.(459) 이 시의 문화정치학은 지시(reference)의 문제가 아니라, 지도 그리기 내부에 작가가 갖는 그의 힘 벡터에 달려있다.
- 우리의 과제는 단지 플러스와 마이너스를 동시에 사유하는 법을 배우는 것만이 아니라, “비-지식의 밤” 속에서 위험한 결정을 내리는 것. 그렇지 않다면,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은 극소-전자 자본주의 문화 논리를 보편적(어디서나 유효한 문화 논리)이라고 주장하는 기능을 하게 된다. 문화란 문화적 설명이다. 모든 것을 문화라고 말하는 것은 모든 것을 그저 문화로 만드는 짓이다. 급진적 다문화주의는 “문화”를 특정 사회의 복잡한 전략적 상황을, 잔여적인 것이 부상중인 것으로 지배류 속으로 들어가는 상황을 가리키는 이름이라고 여긴다.(462)

- 포스트모던 패션. 일시적, 시장 변동. 일본 디자이너 레이 카와쿠보의 예(1984년 2월 14일자 Village voice 기사) 오리엔탈리즘적, 페미니즘적 자본주의 문화 우월주의를 정형화한 예. 나는 식식민 공간에서의 특권화된 거주민이 지배적인 급진인사들에 의해 지정학적 타자라는 주체-입장을 종종 부여받는다고 논의해 왔다. 머스 커닝엄의 의상을 디자인하는 레이 카와쿠보는 이에 너무 잘 포획. 그녀는 얼마나 다른가, 얼마나 일본적인가, 하지만, 그녀를 정의하고 실로 일본을 정의하는 권위적인 문화담론은 유럽-미국 문화사 속에 있다. 보도된 그녀의 자기-기술은 여기에 맞선다. “저는 전통이나 관습 혹은 지리에 제한받지 않는 것을 중요하다고 늘 느껴 왔어요.”(468) 이는 문화적 자기-제시(self-presentation)과도 반대된다.(‘일본은 자국을 진보된 서구의 일부로 아시아 나라들에 제시해야한 한다. 또한 일본은 자국이 아시아를 가장 잘 대표하는 나라임을 서구에 확신시키기 위해 자국을 아시아적인 것으로 제시해야 한다.’(470)- 문화적 각인의 실체)
- 동일성과 차이 사이의 투쟁(같지만-같지-않은, 다르지만-다르지-않은) 뉴욕 패션계에서 카와쿠보는 유럽의 타자로 정의된다. 카와쿠보의 의상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은 인식적 지도 그리기를 배울 후보자로 인지될 수 있는 전 지구적 주체다. 다국적주의의 마지못한 대가들은 백남준(동일성-자신의 포스트식민적 출신을 언급하지 않는다)과 피럴먼의 중국 책(차이-차이나타운의 중국인들이 지닌 디아스포라적 성격을 언급하지 않는다) 사이를 왔다갔다할 수 있다.
- 이 책 전체에서의 나의 요점은 이러한 ‘나’의 주체입장(현재 저자인 나처럼 디아스포라 주체가 된 토착 포스트식민 엘리트에 속할 때조자도)이 마음대로 투명해질 수 있도록 역사적으로 구성되고 생산된다는 것. 물론 바르트는 이를 전적으로 간과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의 대상구성에서는 모종의 미끄러짐이 작동한다. 일본은 (서구한테는 아시아요, 제국주의 이후 시대를 사는 아시아한테는 서구라는) 유희 속에서 기호들의 제국과 스스로 경합을 벌인다.(474) (유럽의 상상계 속에서) 1970년대 일본이 선택된 것 전적으로 우연은 아님.(“발명”됨) 역사라는 것이 거대서사라 할지라도, 중요하면서도 폐제된 토착정보원의 주체-입장 또한 역사적으로 따라서 지정학적으로 각인된다는 게 나의 요점이다.(475)

- 미니멀리즘 예술가 로버트 모리스. <아트포럼>에 실린 「나즈카와 나란히」. 모리스와 제임슨은 각자의 운신을 위해 “문화적 지배류”의 적합한 재료로서 시간이 아니라 공간을 주장한다. 그리고 음성중심. 모리스에게 글쓰기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착취를 표시한다. 모리스가 공간을 글쓰기의 밋밋한 공간이라기보다 “실재”공간으로 다룰 경우, 그것은 “자연의 힘들을 인간의 디자인으로 돌리는 일”이 될 것이다. “자연의 힘은 예술가의 표식들을 통해 흐른다” 페루의 기하학적 석조건축물과 미니멀리즘 예술의 유사성에 주목.(480) “(나즈카의 선) 형태들에 무슨 의도가 깔려 있든 간에 그것들은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모종의 예술들과 형태학적으로 관련된다. 나즈카의 목적들은 과거에 상실되었더라도, 우리의 현재 맥락을 유익한 부조 속을 던져 넣을 수 있다.” - 의향과 형식이라는 이항대립, 이해관계가 깔린 서사를 작동하게 해준다. 여기서, 의도하는(intending) 주체는 역사가 없거나, 그 주체의 유일한 역사는 우리 시대 유럽-미국인의 역사이다. 이상은 내포된 역사적 서사를 주관주의적(subjectivist) 예술가의 악명높은 무역사성을 환기함으로써 무시하는 과정을 보여준다.(482)
- 모리스의 <프롤로그-일기>. 자연스런 공감을 전달하고자 「일기」에서는 강력한 남근중심적 이미지가 사용된다. 여성이라는 성적 대상은 오래 전에 죽었지만 아름답게 보존된 문명의 한 가지 형상이다. 미니멀리즘으로 하여금 나즈카인들의 “더욱 심층적인 의미”를 발견하도록 허용해주는 것은 바로 역사와 정치를 가로지르는 남성유대의 가능성이다.(484)

- 다문화주의적 투쟁에서 “문화”라는 말의 용법은 푸코의 “권력” 용법에 필적한다. “문화”란 특정한 사회의 복잡한 전략적 상황에 우리가 부여하는 이름이다.(486) 단순하게 말해, 살아있는 문화란 항상 작동중이고 항상 변화무쌍하다. 우리의 과업은 한 문화권의 이성 주장에 외부자뿐만 아니라 내부자도 맞서는 전투적 절규로서 문화, 외부자들의 이국성에 붙이는 우아한 이름으로서 문화라는 두 전략 양쪽을 바라보는 것이다.(489)
- 앞장들에서 우리는 몇몇 철학, 역사, 문학 텍스트들을 다루었다. 이 책을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을 생산해 내는 것은 사회적 텍스트인데, 내가 다룬 텍스트들도 이 사회적 텍스트에 복잡하게 얽혀 들어가 있었다. 우리는 사회적인 것의 짜임새 속에, 또 그 짜임새의 사회적 주름들 속에 좀더 직접 형상화된다. 식민, 포스트식민, 새로운 이민자, 혼종적, 초국가적, 포스트모던, 서발턴. 그러므로 “문화” 또한 사람이 어떻게 알게 되는가를 둘러싼 하나의 규율적 원칙임을 다시 한번 기억하는 게 좋겠다. 이 규율적 원칙이 바로 푸코의 유명한 아는-능력(capacity-to-know)의 이중항 권력/지식(pouvoir/savoir)이다. 앎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으로서 권력/지식은 바탕 수준에서의 “문화”다.(490) 나는 문화정치학 연구자.

- 탈식민화중이거나 탈식민화된 국가들이 “신자유주의적” 세계경제체계의 정통 제약들을 탈피하기란 불가능하다. 이 신자유주의적 세계경제 체계는 발전의 이름으로, “지속가능한 개발”의 이름으로 자신의 취약한 국민 경제들 사이의 모든 장벽을 제거하고 있어 사회적 재분배의 어떠한 가능성도 심각하게 손상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초국가성에서 “새로운 디아스포라”란 이미 발전된 땅에 뿌리를 내릴 수 있기 위해 “발전중인” 국민들의 씨를 새로이 흩뿌리는 것이다. 이것은 유럽중심적 이주, 남녀 양편에서의 노동수출, 경계 가로지르기, 정치 수용소의 추구, 아시아 및 아프리카의 “위안부”를 적당히 근절시키는 데 혈안이 되는 것을 말한다.... ~계-미국인들은 자기 자신을 희생자가 아니라 착취를 할 수 있는 행위자로 다시 생각할 수 있을 터이다.(492)
- 나는 문화정치적 서사화의 광범위한 획을 그으면서 일반화를 무릅써 보고자 한다. 엘리트 “포스트식민주의”는 인종적 하층계급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만큼이나 스스로를 바로 인종적 하층계급으로부터 차별화하려는 전략처럼 보인다.(493)
- 18세기말에 시작된 자본주의적 영토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는 신식민주의가 시작된 1940년대 중반에 끝났다고들 한다. 그 초기 시절 동안, 백인은 아니지만-상당히-백인 같으면서 외국인 지배자들과 토착 피지배자들 사이의 완충지대로서 활동했던 토착민 출신의 기능적 지식계층이 생산되었다. 이것이 바로 소위 식민주체 형성을 가장 널리, 또 가장 추상적으로 설명하는 대목이다. 지배적인 유럽인 주체의 거대서사를 떠받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서사이다.(495)
- 거대한 영토 제국주의들이 와해되기 시작하고 탈식민화 시기가 시작되었을 때 토착 엘리트들의 문화적-정치적 운명은 어떻게 되었는가? 신생 국가들에서 그들은 새로운 문화정체성을 벼리는 데서 강력한 역할을 행했다. 지역학은 냉전 시기에 터져 나와서, 탈식민화의 수호자로서 미국의 자기-재현을 지지하는 역할을 했다. 바로 이 지역학이 토착 엘리트 계층의 일부를 흡수했던 것.

- 포스트식민 정보원은 탈식민화된 국가 내부의 억압받는 소수자들에 대해서는 잘해야 특별히 잘 준비된 연구자로서 외에는 별로 할 말이 없다. 하지만 다시금 이 포스트식민 정보원들은 메트로폴리스 공간에 있는 다른 인종적, 에스닉한 소수자들과 동일시한다. 그에 따라 억압의 머나먼 대상들과의 동일시라는 아우라가 이 정보원들에게 덜컥 달라붙는다. 최악의 경우 그들은 이 아우라를 활용하여, 지식생산 기계와의 연루를 부인함으로써 오염되지 않은 토착정보원 행세를 한다. 그래서 이 집단은 새로운 제3세계라는 시뮬레이션 효과를 만들어냄으로써, 또 문화적 에스닉한 특수성과 연속성 및 국민적 정체성을 합법화하는 거대서사들을 한데 모음으로서 투쟁을 잠식한다. “회고적 환각”의 한 부류라고나 할까. 이러한 은폐의 지속적이고 다양화된 생산물이 바로 “타자” “바탕 수준의 활동”, 일종의 내장된 비판적 계기인 포스트모더니티에 “부상중인 담론들”이다. 인종적 하층계급과 서발턴적 남은 어둠 속으로 뒷걸음질쳐 물러난다.(496)
- 이런 활동은 일종의 공식을 발생시킨다. 즉, 식민주의는 근대화/모더니즘이었고, 포스트식민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저항이거나 “진정한”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이제는 오로지 포스트모던 포스트식민주의자만이 혼종을 자처하는 승리도취자가 된다.(497)
(오늘날 UN식 보편주의 페미니즘은 말하자면 탐욕스런 자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궁핍한 자들의 필요를 써먹기 위해 여성들의 집단성을 만들어낸다. 젠더화된 “포스트식민” 주체가 여기서 다소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나는 이 관계를 공생관계라기보다 공모 (함께 포개져 있는) 관계라고 부르고 싶다.

- 맥루한과 료타르. 전자 테크놀러지의 진보는 “서구”(맥루한) 혹은 “텔레마틱 사회”(료타르)로 하여금 전 자본주의적, 영적 풍성함에 되돌아갈 수 있게 했으며 그것도 이에 수반되는 불편함 없이 그럴 수 있게 해주었다고 한다. 이 전제는 겉으로만 명백하게 탈중심화된 포스트포디즘적 포스트모던 자본주의와 전 지구적 텔레코뮤니케이션을 정당화한다.(501)
- “EFTS전자 자금이체 체계는 모든.. 지구행성 데이터베이스를 작동하는 원형으로 간주될 수 있다. 한 조직이 국가에서 가장 커다란 경제 집단이 될 때 그것은 사회구조가 된다.” 전지구적 금융화(503)
료타르와 맥루한 둘 다 “지식이란 모든 사람이 활용할 것이며(맥루한) 그렇게 되어야 한다(료타르)”는 경건한 어조로 끝을 맺는다. 전자지배하는 전 세계(pax electronica) 만세! 모두에게 “자유로운 전자통신”을 분배함으로써 세계무역기구의 “평평한 운동장”으로 가는 중.(507)
- 발전이라는 위대한 서사의 자금을 지원하고 협조체계를 만드는 대리인은 <세계은행>이다.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표현은 전 지구성을 관리하는 모든 단체들의 담론에 진입해 왔다. 무엇을 지속시키기 위한 발전이란 말인가? 전 지구적 발전의 일반 이데올로기는 인종차별주의적 온정주의다. 그것의 일반적 경제는 자본집약적 투자이며, 그것의 광범위한 정치학은 저항과 서발턴을 침묵시키는 것이다.(510)

- 4장을 쓰고 있는 나는 남의 민족주의, 북의 복지국가라는 초국가적 지식능력의 이해관계 속을 맴돈다.(516) “자유시장” <세계은행>과 <세계무역기구>가 이러한 경쟁을 조작하는 주요 조직이다. 여러분에게 초국가적 지식능력이 없다면 그래서 이렇게 강요된 경쟁을 설명하지 못한다면, 인종차별주의-속의-이주와 대문자로 쓴 발전 사이의 아포리아를 풀어낼 수 없다.(518)
- 런던의 한 예술가의 예. 르완다에서 전시회. 그는 르완다인이 겪고 있는 고통의 이미지를 올바르게 접근하는 유일한 통로로 국제 NGO들을 찬양한다. 과시적으로 억제된 선정주의가 엿보인다. 역사란 개인적 선의보다 훨씬 큰 것이며, 우리가 정치적으로 되고자 연구하고 있다면 책임지는 법도 배워야 한다.
- 여기서 제3세계 부르주아와 제1세계 이주민들 사이의 강력한 연관성, 실로 그 공모성이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전 지구성을 운운한다면, 특히 하층계급 이주민들이 인종차별주의를 견뎌내야만 하는 정동상의 하위 공간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의 중요성이 어느 정도이든 간에 전 지구적 자본 속에 있는 이주민의 이해관계를 우리는 시인해야 한다. 그러한 시인이야말로 윤리적 상황 내부에 있는 불가능한 것의 고통스런 명령들 중 하나다. 이주민은 제1세계 공간에 있다. 나는 이주민 하층계급에 대한 인종, 젠더, 계급적 착취에 맞서는 메트로폴리탄 액티비즘을 전적으로 지지한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전 지구성을 말하고 있다. (522)
- 우리는 분할되지 않은 저 불가능한 세상에서 생태학적 정의를 꿈꾸어야 한다.(523) 우리는 세계의 본래적, 실천적, 생태학적 철학들로부터 배워야 한다. 우리는 제4세계만이 아니라 전 지구를 향상시키기 위해 세계에서 가장 힘차게 동원되고 있는 담론을 모종의 방식으로 사용하기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러한 배움은 집단적 노력을 사랑으로 대리보충함으로써 시도될 수 있을 뿐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을 받을 가치가 있는 것은 노력이다. 사람이 통제할 수도 없지만 저항해서도 안 되는 그런 노력, 양편 모두에 주의를 쏟는 지난한 노력 말이다. 우리가 강제나 위기 없이 어떻게 서발탄의 주목을 끌겠는가? 도대체 확실할 수 없는 윤리적 특이성의 가능성을 바라보며, 양편에서 마음을 바꿔먹지 않는다면 말이다.(524)
- 윤리적 특이성. 우리는 형상(figures)을 현상화(phenomenalizing)하고 있는 것이지, 급진적 대타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한 사람에게 깊이 개입할 때, 그 반응-대답-은 양편에서 나온다. 이를 “응답”능력(answer ability) 혹은 책임능력(accountability)뿐만 아니라 책임(responsibility)이라고 부르도록 하자.(525) 반응이 양편으로부터 흘러나올 때 윤리적 특이성에 접근할 수 있다.

- 서발턴 여성 집단. 통계상의 의심스런 “통일성” 속에 던져진 “민족이전” 집단. 세계의 자원이 고갈된 책임을 남의 인구폭발로 돌리며 남의 가난한 여성들을 탓한다. 여성을 하나의 이슈로 만들면서 원조를 정당화하여 북의 과소비를 주목하지 못하게 한다. 전 지구화의 두 얼굴.(527)
- 가내노동자 조직하기. 여성들은 내면화된 젠더화를 “문화적” 각인 내부에서의 윤리적 선택으로 지각한다. 이러한 젠더화 때문에 여성으로서 훌륭한 것이라거나 윤리적인 것이라는 의지적 확신의 이름으로 여성들은 성차별주의와 착취를 받아들인다.
- 새로운 이민자. 전 지구적 네트워크, 초국가적 금융화 속 토착정보원 혹은 포스트식민. 포스트식민이 좀더 예전의 담론구성체에 속해있다면, 새로운 이민자는 텍스트의 주름들 속에 엮여 들어가 있다. 이 형상은 불가능한 것을 가시화한다.(537)
- 애초부터 이민자들의 국가였던 미국의 면모 인식해야 한다. 새로운 이민자들의 “민족적 출신성분”은 시인되지 않은 역사적 미국문화에 이바지해오지 못했다. 때문에 우리는 다양한 출신들이 그려내는 우리의 무지개를 현재 미국사의 일부로 인식할 것을 요구한다.(539) 우리의 출신국들이 아니라 새로운 미국인들이라는 우리의 지위와 관련된 거래이다.
- 프레드릭 제임슨은 도덕주의를 떨쳐버리고 장점과 단점을 둔 다 생각하자고 우리를 훈계한다. 이는 혼종성의 낭만화를 불만스러워하는 새로운 이민자에게 충분치 않다. 우리에게 토착정보원-겸-혼종적-전 지구화주의자가 되도록 촉구되는 이 때에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543) 우리의 관점을 어떻게 더 커다란 초국적 지식능력으로 넓힐 수 있을까. 초국가성의 가능성.
- 새로운 이민자(여성), 그들이 자신의 출신국으로 진입하는 지점을 통해 남에서 일어나는 전 지구를-에워싸는 사회운동들에 합류한다면 어떻게 될까. 사회주의적, 전지구적 인식 없는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는 미국의 토대를 확장시켜 줄 뿐이다.(547)
- 호주 선주민 예, 운디드 니 대량학살 이후, 수(Sioux) 족 추장의 오두막은 1982년 시카고 전시회장으로 옮겨진다. 제1세계 다문화주의에서 “문화”를 무대화하기 위해 유럽중심적, 경제적 이주의 주체를 자유롭게 해주는 것은 바로 “자본”이다.

(562) 스피박이 초국가성과 대안적 발전을 말할 때 방글라데시에 주목하는 이유. 언어구사의 문제. 힌두어(인도 국어) 지식, 산스크리트어(힌두 고전 언어)지식, 벵골어(나의 모국어) + 영어 두 언어 구사능력, 향상된 의식을 갖는 디아스포라의 정치적/문화적인 많은 부분이 나로 하여금 식민/포스트식민을 함께 쟁기질하도록 해주었다. 지역의 해당 언어를 잘 알아야 한다는 점(562)

- 초국가성 속에 수출주도형 의류 산업을 위치시키는 것은 페미니즘적 문화연구 관련 세미나의 틀 속에 내가 놓고 있는 밋밋한 일상사를 나에게 사용하도록 허용한다. 또 초국가성이 사람들이 장소에서 장소로 옮겨다니는 것을 일차적으로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을 설명하도록 해준다.(563)
일화적 예, 뉴욕의 <새로운 박물관> 개관식에서의 스피박. 방그라시에서 만든 의복 착용.
- 국제적 복장산업과 관련해 외국인 직접투자가 진행된 결과, 방글라데시의 오랜 손 베틀 전통은 죽어가고 있다. <프라바르타나>사는 직조공 집단에 보조금을 지원하고, 직조공들을 예술가로 인식함으로써 직조공들이 겪는 인식소적 위반을 해제하고자 시도한다. 그 옷을 걸치고 있는 스피박, 하나의 전시물인 몸 위에 초국가화의 모순을 걸치고 박물관에 서 있었던 셈.(564)
인권을 무역-관련 투자 문제로 만들어내 것(아동노동), 보이콧 정치학의 안이한 선의, 도덕적 제국주의의 나른한 잔인함을 둘러싼 것에 대해 나는 쓰고 있다. 내가 간청하는 바는, 전 지구를 에워싸는 민족들의 운동과 연결되는 지역적 저항의 행동, 교섭 능력을 인식하자는 것이다.

- 4장에서 나는 다문화주의와 전 지구성의 상호작용을 검토하고자 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후기자본주의 문화논리인가? 나는 이 논쟁을 헤치고 나가면서 직물 짜기의 텍스트적 흐름을 통과하며 작업해 나갔다. 경제적 포스트모던화의 사상자들은 문화주의자들이 아니다. 이 사상자들은 포스트모더니티에서 삭제된 자본논리에 우리의 눈길을 고정하라고 일러준다. 자본주의의 혜택과 폐해를 동시에 생각하는 게 요점이 될 수 없다.(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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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공지] 디페시 차크라바르티, 『유럽을 지방화하기』 ― 3월 1일 시작!
voov11 | 2023.02.22 | 추천 0 | 조회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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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읽어주세요!] 강의실/세미나실에서 식음료를 드시는 경우
다중지성의 정원 | 2023.02.21 | 추천 0 | 조회 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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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를 순연하실 경우 게시판에 공지를 올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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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홍보 요청 양식
다중지성의 정원 | 2023.02.21 | 추천 0 | 조회 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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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1 『포스트식민 이성 비판』 4장 문화 - 발제문
chu | 2023.06.21 | 추천 0 | 조회 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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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1 마지막 세미나! [4장]
voov11 | 2023.06.20 | 추천 0 | 조회 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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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식민이성 비판> 3장. 역사
bora | 2023.06.03 | 추천 0 | 조회 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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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탈식민주의 읽기 세미나 공지
bomi | 2023.05.31 | 추천 0 | 조회 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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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발제] 『포스트식민 이성 비판』 2장
bomi | 2023.05.31 | 추천 0 | 조회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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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5/31 탈식민주의 읽기 세미나 공지
voov11 | 2023.05.25 | 추천 0 | 조회 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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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식민이성비판> 서문, 1장 전반(-81p)_발제문
Jina Lee | 2023.05.17 | 추천 0 | 조회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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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식민이성비판 1장 81~1장 끝까지
voov11 | 2023.05.17 | 추천 0 | 조회 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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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5/3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4, 5부
bomi | 2023.05.03 | 추천 0 | 조회 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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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4부 발제문
chu | 2023.05.03 | 추천 0 | 조회 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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