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구 (백석)

작성자
點心
작성일
2020-05-07 03:50
조회
1219
오대(五代)나 나린다는 크나큰 집 다 찌그러진 들지고방 어득시근한 구석에서 쌀독과 말쿠지와 숫돌과 신뚝과 그리고 녯적과 또 열두 데석님과 친하니 살으면서

한 해에 멫 번 매연 지난 먼 조상들의 최방등 제사에는 컴컴한 고방 구석을 나와서 대멀머리에 외얏맹건을 지르터맨 늙은 제관의 손에 정갈히 몸을 씻고 교우 우에 모신 신주 앞에 환한 촛불 밑에 피나무 소담한 제상 위에 떡 보탕 식혜 산적 나물지짐 반봉 과일 들을 공손하니 받들고 먼 후손들의 공경스러운 절과 잔을 굽어보고 또 애끊는 통곡과 축을 귀에 하고 그리고 합문 뒤에는 흠향 오는 구신들과 호호히 접하는 것

구신과 사람과 넋과 목숨과 있는 것과 없는 것과 한 줌 흙과 한 점 살과 먼 녯조상과 먼 훗자손의 거륵한 아득한 슬픔을 담는 것

내 손자의 손자와 손자와 나와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와 수원 백씨(水原白氏) 정주백촌(定州白村))의 힘세고 꿋꿋하나 어질고 정 많은 호랑이 같은 곰 같은 소 같은 피의 비 같은 밤 같은 달 같은 슬픔을 담는 것 아 슬픔을 담는 것

ㅡ <목구(木具)>, 『文章』 2권 2호, 1940. 2

시 <목구>는 백석이 서울에서 쓴 마지막 시편이다.

이 시의 제목 ‘목구’는 평안북도 사투리이다. 표준어는 나무로 만든 제기로서 ‘목기’이다. 그러니까 제사 때 쓰는 나무 그릇이다. 떡, 탕, 식혜, 산적, 나물, 생선, 과일 들을 담는다.

새로 난 쌀로 빚은 떡과 과일을 올린 나무 그릇에서 귀신과 사람이 만난다. 넋과 목숨이 만난다. 없는 것과 있는 것이 만난다. 한 줌 흙과 한 점 살이 만난다. 먼 옛날의 조상과 먼 훗날의 자손이 만난다.

만남은 거룩한 슬픔이다. 아득한 슬픔이다. 힘센 슬픔이다. 꿋꿋한 슬픔이다. 정 많은 슬픔이다. 호랑이 같은 슬픔이다. 곰 같은 슬픔이다. 소 같은 슬픔이다. 피의 슬픔이다. 비 같은 슬픔이다. 밤 같은 슬픔이다. 달 같은 슬픔이다.

백석은 시 <목구>를 『文章』에 보내고 만주행 기차를 탄다. 기차에 ‘가난한’ 시인이 ‘사랑'하는 ‘아름다운 나타샤’는 동행하지 못한다. 그는 왜 만주로 떠날까? ‘가난한’ 시인이 ‘사랑’하는 ‘아름다운 나타샤’는 왜 동행하지 않을까?

1940년 2월에 중국 장춘에 도착하고 5개월 뒤에 『文章』에 보낸 시 <북방에서ㅡ정현웅에게>(1940년 7월)에서 백석은 ‘조상’도 ‘형제’도 ‘일가친척‘도 ’정다운 이웃’도 ‘그리운 것‘도 ’사랑하는 것‘도 ’우러르는 것‘도 '나의 자랑'도 '나의 힘'도 '바람과 물과 세월과 같이 지나가고 없다’고 고백한다.

만주에서 만난 고독은, 시 <목구>를 쓰고, 혼자 기차를 탈 때 이미 각오한 외로움이면서, 소중한 사람들을 저버린 부끄러움이고, 반성적 자각이다.

한편 시 <목구>에서 1연의 배경은 고방이다. 백석이 나고 자란 평안북도 정주의 집의 고방은 내가 나고 자란 전라남도 신안의 섬마을 집에도 있다.

백석의 시 <목구>는 고향 마을로 나를 데려간다.

나는 정지용의 시 <향수>를 좋아한다. 그런데 <향수> 못지 않게 <목구> 에서 고방을 발견한 기쁨이 얼마나 귀한지 모른다.

다도해의 바람 매운 바닷가 동네에서 9살까지 살며 나는 우리집 안방에 딸린 고방에 곧잘 드나든다. 고방의 쌀 뒤주를 열고 쌀을 한 줌 쥐고 나온다. 생쌀을 입에 넣는다. 쌀을 씹고 씹으면 입에 단물이 고인다.

백석의 시 <목구>를 읽고 있으면 고향 집 고방의 쌀 뒤주에서 지금 막 꺼내온 햅쌀을 씹는 맛이 떠오른다.

감나무가 많은 동네이다. 바람이 사나운 동네이다. 바람은 아직 익지도 않은 감을 두, 두, 두, 두 떨어뜨린다. 땅에 떨어진 푸른 감을 먹을 수는 없다. 할머니는 떫은 감을 고방 뒤주의 쌀 속에 묻어둔다. 감 넣은 일을 잊을만 할 때 감을 꺼낸다. 떫은 맛은 사라지고 단맛이 들어 있다. 떫은 감을 단감으로 변화시키는 고방은 참 신기한 공간이다.

고방은 숨바꼭질을 할 때 꼭꼭 숨기에도 알맞다. 고방에 숨어 있다가 잠이 들기도 한다. 술래가 끝내 찾지 못해도 별일 아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물놀이를 극구 못하게 말리지만 숨바꼭질은 말리지 않는다.

점빵이 따로 없는 동네이다. 장이 서는 읍내까지 산길 10리를 걸어야 한다. 군것질 거리로 칡이 최고다. 하지만, 칡을 매일 캐지 못한다. 어쩌다 칡을 한 뿌리 캐면 여럿이 나누고 며칠간 입술이 까맣게 변한 줄도 모른 채 칡 뿌리를 씹는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하루는, 아버지가 선물로 받아 다락에 모아둔 담배들 중에서 한 갑을 몰래 들고 나온 나는 담배를 들고 바닷가로 간다. 바닷가 바위에 숨어서 담배곽을 뜯고 동네 형들에게 나눈다. 형들은 뻘에 들어가 담배를 피운다. 나도 뻘을 딛고 서서 댐배를 한 가치 피운다. 내 생애 최초의 흡연이다.

곧 땅거미가 지고, 집에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집으로 향하는 발이 그렇게 무거울 수 없다. 집 안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아니나 다를까. 동네 어른들이 우리집에 모두 모여 있는 것이 아닌가. 도저히 마당으로 걸어 들어갈 수 없다. 집 뒤 동백나무를 타고 들어가 고방으로 숨어 들어간다. 고방의 쌀 뒤주를 열고 뒤주 안에 몸을 숨긴다.

문 바깥에 모인 어른들의 목소리가 고방의 뒤주 안으로 들어온다.

ㅡ 참으세요.
ㅡ 화난다고 심하게 하다가 잘못되면 큰일나요.
ㅡ 그냥 넘어갑시다.
ㅡ 모르는 척 합시다.

이웃 어른들의 목소리가 고방 띠살문의 문풍지를 적시고 있다. 동네 어른들이 나누는 대화를 다 듣지도 못한 채, 나는 고방의 쌀 뒤주에 앉아 잠이 든다.

잠에서 깨었을 때 안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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