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호] <직장의 신>에 관한 두 개의 글 “미스 김과 영웅신화(문강형준)”, “신자유주의 노동시장 비웃는 터미네이터 ‘미스 김’(황진미)”을 읽고. | 김환희(다중지성의 정원 회원)

기고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2-22 13:45
조회
615
<직장의 신>에 관한 두 개의 글 “미스 김과 영웅신화(문강형준)”,
“신자유주의 노동시장 비웃는 터미네이터 ‘미스 김’(황진미)”을 읽고.


김환희(다중지성의 정원 회원)


최근에 <직장의 신>에 관한 두 개의 글이 한겨레 신문에 실려있다. 게다가 황진미와 문강형준의 두 글은 완전히 상반된 시각에서 이 드라마를 바라보고 있어 매우 흥미로운데, 드라마에 대한 문학적 비평을 넘어서서 사회적으로 시사하는 바를 따져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 글을 써본다.

황진미는 ‘미스김’이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는 새로운 대안적 삶의 모델”을 제시한다고 했지만, 과연 그러한가? 내가 생각하기에 ‘미스김’은 동양적 자본의 노예(가족주의적 노예)에서 서양적인 노예(기계적 노예)로 변형되어가는 한국노동계의 현실을 예시하는 하나의 상징이라고 여겨진다. “3개월마다 사람을 갈아치우면서도 집단적인 조직문화를 앞세어 ‘가족’이니 ‘동료애’니 하는 허위의식으로 노동자들의 꿈과 열정을 착취하는 곳.”이라는 서술은 전형적인 한국형 기업문화의 특징을 이야기하고 있다. 유교적 가부장주의와 군대문화가 기묘하게 결합되어 만들어진 그 기업문화는 한국만의 스트레오타입으로, 자본의 일반적 경향으로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서구의 기업문화를 살펴보면 오히려 미스 김처럼 주어진 업무범위와 계약기간을 서류에 명시하며, 사적 생활과의 선을 분명히 긋는 “기계”적 “노예”의 형태가 더 일반화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가족주의적 노예에서 기계적 노예로의 이행은 있을지언정 미스김이 “노예가 되기를 거부”했다고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또한 ‘미스김’이 “기계가 되는 삶을 문자 그대로 실천하여 자본주의 노동의 본령인 전인격적 착취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은 허상에 불구하다. “노동 시간을 줄이고, 소비의 욕망을 제어하며, 개인으로서의 자아를 끊임없이 계발하여 전인이 되는 삶!”을 획득한 것처럼 보였던 그녀의 승리는 거의 신과 맞먹는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여 잉여가치를 창출한 것에 대한 ‘자본으로부터의’ 작은 보상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녀는 결코 “전인이 되는 삶을 영위”할 수 없다. 칼퇴 덕분에 가능했던 몇 십분 정도의 자유를 제외한다면, 하루 반나절 이상의 시간을 착취 속에서 보내는 여타 많은 (비)정규직처럼 그녀도 또한 자본주의의 ‘노예’이다.

그러므로 나는 미스 김을 ‘영웅신화의 반복’으로 보고 있는 문강형준의 분석에 더 동의하게 된다. 실제로 미스 김이 “사용설명서”에 근거하여 거부하고 칼퇴하며 남겨둔 업무는 고스란히 회사 내의 최약자인 또다른 비정규직 ‘세진이’에게 넘어가게 된다. 반도의 흔한 갑남을녀 비정규직들에게 미스김은 도달하지 못할 판타지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미스 김의 현재 위치에 대한 적확한 분석에도 불구하고 다음의 결론에는 동의할 수가 없다. “이제 비정규직 문제는 ‘신’이 아니면 풀 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계발로 다져진 유연한 대처능력으로 위기를 해결하는 미스 김은 신자유주의가 가장 원하는 영웅, 곧 휴먼 캐피털이다.” 과연 미스김은 자본에게 충실한 영웅적 시종에 불과한가. 황진미의 ‘미스김’에 대한 지나치게 긍정적인 해석(새로운 저항의 아이콘)과 문강형준의 지나치게 부정적인 해석(신자유주의의 영웅)사이에서, 미스김을 전복적인 코드로서 변환할 가능성은 없는 것인가?

일단 나는 미스김의 비정규직이라는 지위 자체가 새로운 전복의 가능성을 역설적으로 상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잃을 것이라곤 족쇄밖에 없다”는 맑스의 뜨거운 외침은 오늘날 비정규직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신자유주의가 ‘노동시장의 유연화’, 더 나아가서는 ‘삶의 불안정화’를 통해서 작동해가는 역사적 경향을 살펴볼 때 비정규직화는 더이상 “노동계급의 ‘예외상태’가 아니라 점차 확대될 ‘정상상태’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거대한 변화의 흐름을 오히려 새로운 주체와 새로운 운동을 탄생시키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인민들의 ‘불안정’한 삶을 가속화시키는 자본의 경향과 그 반동으로서 인민들을 더 강력한 시큐리티의 체제 속으로 구속시키려는 국가의 경향 속에서 우리는 이른바 ‘프레카리아트 운동’을 출현시켜야 하는 것이다. 총선 이후의 완전한 붕괴로부터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좌파진영의 총체적 위기, 그 어둠 앞에서 새로운 기회는 더욱 빛나고 있다. 그것은 기존의 좌파와 우파를 구분했던 이데올로기적 구분을 넘나드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예를 들자면, ‘비정규직 노동 철폐’라는 주장부터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비정규 노동 철폐라는 것은 [노동하지 않는 자가 배제된] ‘노동자’라는 좁은 시야에서, 위계화된 힘의 관계 속에서 비정규 노동을 어딘가에 귀속시키려는 사고방식이 아니냐”는 이진경(<만국의 프레카리아트여 단결하라.>)의 지적은 매우 적절한 것이다. 성별, 나이, 장애의 구분을 넘어서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지급되는 기본소득의 실행과 최저임금의 상향을 통해 ‘지속가능한’ 비정규직이 가능할 때 비정규직은 더 이상 신분 계급의 맨 하층 노예를 형성하는 것이 아닌, 자본과의 동등한 계약관계를 가진 주체의 위치로 올라설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미스김’을 자본주의의 무시무시한 영웅으로서의 터미네이터에서, 저항군의 강력한 아군으로서의 터미네이터로 전유하고자 한다면 ‘비정규 노동 철폐’를 외치기 이전에 기본소득과 최저임금을 높이고자 하는 움직임에 힘을 실어주시라. ‘알바연대/청년좌파(준)/자립음악생산조합’에서 최저임금 1만원운동을 시작하였다. ‘직장의 신’ 애청자들의 열열한 지지와 연대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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