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호] 21세기에 읽는 <독일 이데올로기>

기고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2-23 12:00
조회
905
21세기에 읽는 <독일 이데올로기>

김상범


1.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언어 이론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독일 이데올로기>는 결코 '이데올로기는 현실적 토대의 반영', 또는 '의식은 존재의 반영'이라는 짧은 문구로 요약될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이렇게 속류화된 마르크스주의는 언어의 역할을 축소시켰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있어서 언어는 사실 중요한 것으로 드러난다. 다음과 같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주장을 들어보자.

"이것 역시 처음부터 '순수'의식은 아니었다. '정신'은 애초부터 물질에 '붙들려' 있다는 저주스러운 운명을 짊어지고 있는바, 여기서 그 물질은...언어라는 형태를 띠고 나타난다. 언어는 의식만큼 오래됐다."1)

인간의 사유=의식은 언어라는 '물질'에 의해 규정되며, 정신은 애초부터 이러한 '물질'=언어에 붙들려 있었기 때문에, 언어의 '기원'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언어는 의식만큼 오래됐다." 그러나 이렇게 인간의 사유가 언어에 '붙들려' 있다는 것을 간파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구조주의와 같이 '언어의 외부는 없다'라는 과격한 사유에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언어이론은 '소박한 유물론', 즉 '언어는 사물을 반영한다'는 생각과도 큰 거리가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언어 이론은 언어의 '사회적' 성격을 간파함으로써 소박한 유물론과 구조주의적인 언어 이론을 넘어선다. 발화는 사회적 관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물질적 행동'을 수반한다. 이처럼 인간의 발화행위는 '수행적'이다.

"이념, 표상, 의식의 생산은 우선 인간의 물질적 활동과 물질적 교통 및 현실적 생활의 언어 속에 직접적으로 편입되어 있다. 인간의 표상, 사유, 정신적 교통은... 그의 물질적인 행동의 직접적인 발현으로서 나타난다."2)

뿐만 아니라, "지배계급의 사상이 지배적인 사상"이라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말은 단순히 담론이 권력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담론을 생산하는 것은 개인 주체가 아니라 (들뢰즈-가타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발화행위의 집단적 배치'라는 것도 보여준다. 또한 "지배계급의 사상이 지배적인 사상"이라는 말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익명적인 것으로 보이는 담론도 사실상 어떤 세력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지배계급의 사상을 지배계급 자신으로부터 떼어놓고 거기에 독립적인 존재를 부과하"3)는 것 자체를 하나의 이데올로기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일반적으로 확장해서 담론과 그 담론을 생산하는 자를 떼어 놓는 것을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떼어 놓을 수 없음은 남성으로서 말하는가, 여성으로서 말하는가, 부르주아로서 말하는가, 철학자로서 말하는가 등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몽상과 왜곡은 그들의 실제적인 생활에서의 위치, 그들의 직업, 그리고 분업에 의해서 아주 쉽게 설명된다."4)

이데올로기 비판에서는 이 처럼 '누가 말하는가' 뿐만 아니라, '어떤 욕구에 의해서 말하는가'와 '어떤 사회적 맥락 속에서 말하는가'를 파악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지배계급은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자신의 특수이익을 일반이익인 것처럼 포장하며, 발화는 물질적 교통관계라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드러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언어 이론에서 언어는 기본적으로 사회적이며,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언어를 사회적, 정치적 관계로부터 독립된 것으로 생각하는 소쉬르 이후의 주류 언어학의 전통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2. 감성적 활동과 생산

마르크스는 자신이 인간의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활동으로서 역사를 서술하면서, 역사를 "죽은 사실들의 집적"으로 보는 경험론적-실증주의적인 역사관과 역사를 "상상된 주체의 상상된 행위"5)로 보는 관념론적인 역사관을 동시에 극복했다고 주장한다.

<독일이데올로기>에 나타난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역사기술은 어떤 물질적 '실체'의 운동에 대한 서술과 이 운동의 이데올로기적 반영에 대한 기술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감성적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바로 이 '감성적 세계'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감성적 세계는 인간의 '감성적 활동'6)에 의해 구성된 세계이며 하나의 역사적 산물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구성된 것이며, 역사를 추동하는 것은 어떤 형이상학적 실체가 아니다. 또한 마르크스가 말하는 '현실'은 바로 이 감성적 활동이다.

"이제까지의 모든 유물론...의 주된 결함은 대상, 현실, 감성이 단지 객체 또는 관조의 형식 하에서만 파악되고, 감성적인 인간 활동, 즉 실천으로서, 주체적으로 파악되지 못한 점이다."7)

"이 활동, 즉 끊임없는 감성적 노동과 창조, 이 생산이야말로 현존하는 감성적 세계 전체의 기초이기 때문에..."8)

모든 것은 생산된 것이고 이러한 생산과정 속에서 인간과 자연은 통일되기도 하고 투쟁하기도 한다.

"이러한 '인간과 자연의 통일'은 산업 가운데 언제나 존재했었고, 그것도 산업의 발전정도에 따라 각 시기에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었으며....통일과 마찬가지로 인간과 자연의 '투쟁'도 존재한다는 것이다."9)

이처럼 생산 속에서 인간과 자연은 관계를 맺는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생산력'을 '인간과 자연의 관계'라고 정의 내린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할 것은 이러한 '자연'이 인공적인 것과 무관한 '때묻지 않은 자연'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마르크스에게 있어서의 '자연'은 일종의 '환경'으로서 인간에 의해 구성되는 제2의 자연, 제 3의 자연, 제 n의 자연을 포함하는 것이다. 이는 마르크스의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잘 드러난다.

"... 자연이란 것은...새로이 발생한 오스트레일리아의 몇몇 산호섬 이외에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따라서 포이에르바하에 대해서도 존재하지 않는 그러한 자연도 아닌 것이다."10)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생산 또는 생산양식은 삶이나 존재의 중요하지 않은 일부가 아니라, 삶의 표현이자 존재의 표현, 더 나아가 삶이자 존재 자체이다. 생산은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생산양식은 단순하게 개인들의 육체적 생존의 재생산이란 측면에서만 고찰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것은 이러한 개인들의 일정한 활동방식이고, 자신의 삶을 표현하는 일정한 방법이며, 일정한 생활양식인 것이다. 개인들은 자신의 삶을 표현하는 방식대로 존재한다. 따라서 그들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은 그들의 생산, 다시 말해서 그들이 무엇을 생산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생산하는가와 일치한다."11)

생산이 이처럼 존재 자체를 의미한다면, 생산력은 역능 자체를 의미한다. 한 사회나 국가의 생산력은 그 사회나 국가의 역능이다. 이러한 역능은 기술력과 노동력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국가의 설립과 함께 개개인의 특수이익과 모순되는 국가의 '일반이익'을 증대하기 위해 개개인이 국가적 프로젝트에 강제로 동원됨으로써, 생산력은 증대하지만 이러한 생산력은 개인으로부터 소외된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특수이익을 위한 실천적 투쟁은 국가형태에 내재된 환상적 '일반'이익의 실질적 간섭과 제약을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사회제력, 곧 분업이 낳은 다양한 개인들 사이의 협업을 통해서 설립되는 배가된 생산력은....그들 자신의 통일된 힘으로서가 아니라 낯선 하나의 외적 강제력으로서 등장한다. ...그들이 그 힘을 지배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이 인간의 의지 및 행동에서 독립한 독자적인 것으로서, 인간의 의지와 행동을 지배하는 일련의 국면과 발전단계를 관통해 나간다."12)

그리고 자본주의가 들어서게 됨으로 인해 이러한 소외는 자본에 의해 더 가속화된다.

3. 생산력과 교통형태, 그리고 혁명적 공동체에 대하여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생산력은 감성적 세계, 즉 우리가 사는 세계를 창조하고 구성하는 역능이다. 따라서 생산력의 발전은 기존의 사회적 관계=교통형태와 모순될 수 밖에 없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바로 이러한 생산력과 교통형태의 모순이 역사를 움직이는 힘이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역사상 모든 충돌은 생산력과 교통형태의 모순 속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13)고 까지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산력과 교통형태 사이의 모순은 혁명 속에서 폭발했다고 그들은 말한다.

이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주체 없는 혁명', 혹은 '혁명의 대수학'을 설파했다는 것을 의미 하는가? 그렇지 않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혁명적 주체성의 형성 없이 혁명의 성공을 보장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한편으로는 현존의 생산력,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의 '생활의 생산' 자체, 그것이 토대로 삼고 있는 '전체적 활동'에 대해서도 반항하는 혁명적 대중의 형성이 없다면...혁명의 이념이 수백 번 표방된다 하더라도 실제로 혁명의 발전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14)

기존의 '생활의 생산' 자체, 그리고 '전체적 활동'에 반항하는 혁명적 대중의 형성이라는 것은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 자체를 거부하는 대중의 형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혁명적 대중이 혁명을 성공시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 번째로 그것은 단결된 혁명적 대중이 생산력을 총체적으로 전유하는 것, 즉 각 개인들이 생산도구들의 총체를 전유함과 동시에 각 개인들이 스스로 이에 상응하는 자신의 역능(능력)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생산력을 총체적으로 전유함으로써 국가와 자본에 의해 생겨난, 각 개인들의 '생산력으로부터의 소외'가 사라지게 된다.

또 하나는 '교통형태 자체의 생산', 즉 사회적 관계를 다시 짜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관계에 의해 규정되면서도 이러한 사회적 관계의 그물망을 찢고 다시 구성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사회적 관계를 혁명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은 혁명적 공동체의 형성이라는 목표와 연결되어 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생산력으로부터 개인을 소외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분업을 철폐해야 하는데, 이러한 분업의 철폐는 공동체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공동체 속에서만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있었던 공동체의 대용물에서는, 곧 국가 따위에서는 인격적 자유가 지배계급의 관계 속에서 자라난 개인에게만, 그리고 그들이 이 계급에 속하는 개인인 한에서만 존재했다."15) 마르크스는 이러한 공동체를 '가상적 공동체'라고 부르고 있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공동체는 피지배계급의 개인들로부터 독립하여 지배계급을 하나로 결합시킴으로서 초월적인 일자로 군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결사'(association)에 의해 구성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공동체는 하나의 내재적 공동체로서 '현실적인 공동체'라고 말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개인들의 결사 위에 군림하는 초월적인 일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공동체에서는 정반대가 된다. 이 공동체에 개인들은 개인으로서 참가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개인들의 자유로운 발전 및 운동의 조건들을 자기 통제 아래 두는 개인들의 결합체...이다."16)

이처럼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결사'로서의 공동체의 건설만이 생산력의 총체적 전유와 사회적 관계의 혁명적 구성을 통해서 혁명을 성공시킬 수 있다.

1) 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김대웅 역, <독일 이데올로기1>(두레, 1989),p.71
2) <독일 이데올로기1>,p.65
3) <독일 이데올로기1>,p.93
4) <독일 이데올로기1>,p.96
5) <독일 이데올로기1>,p.66
6) 근대철학에 있어서 '감성'은 수동적인 반면에 마르크스가 말하는 '감성'은 활동적이다. 근대철학의 전통에서 감성은 외부세계를 수용하는 인식론적 능력인 반면 마르크스의 감성은 세계 자체를 구성하는, 존재론적 힘이다. 그리고 이 차이는 결정적이다. 낭만파의 '수동적 감성'은 현실의 모순을 '상상적'으로(미학적으로) 넘어서게 하는 반면에 '활동적 감성'은 현실의 모순을 '실천적'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7) <독일 이데올로기1>,p.37
8) <독일 이데올로기1>,p.89
9) <독일 이데올로기1>,p.88
10) <독일 이데올로기1>,p.89
11) <독일 이데올로기1>,p.59
12) <독일 이데올로기1>,p.76
13) <독일 이데올로기1>,p.128
14) <독일 이데올로기1>,p.82
15) <독일 이데올로기1>,p.129
16) 같은 책, 같은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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