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호]가라타니 고진의 내셔널리즘론-분석과 비판

기고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2-23 11:48
조회
765
가라타니 고진의 내셔널리즘론
-분석과 비판

김상범


1.
가라타니 고진의 내셔널리즘론은 치밀하고 정교하게 구축되어 있다. 그래서 그의 내셔널리즘을 비판적으로 음미하는 것은 물론 그것을 분석하는 것도 섬세한 지성과 끈기가 요구되는 일이다. 우선 그의 내셔널리즘론에 대해 분석과 비판을 하기 위해 그의 텍스트를 대단히 꼼꼼히 읽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 글은 그러한 꼼꼼한 읽기에서 비롯된 분석과 비판이다.

메이지 일본의 근대화에 의해 학문/예술 제도가 서구화되고 또 서구화되지 않은 학문/예술은 대학에서 배제되었으나, 도쿄미술학교는 일본미술이 중심이 되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가라타니 고진은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그것은...일본의 회화/민예품이 유럽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우키요에 판화는 1850년대부터 유럽에서, 특히 인상파 화가에 의해 높이 평가되었으며, 더욱이 1867년 파리박람회에 도쿠가와바쿠후가 제출한 작품들은 그들에게 충격을 주었다.”1)

서양에서 일본의 회화는 당시의 서구의 사실주의 회화를 넘어서는 것으로서 생각되었고, 서양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것이다. 이것은 어네스트 페놀로사(Ernest Fenollasa)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동양미술이 서양미술보다 우위에 있다고 판단하고, 일본미술을 분류하고 체계화하는데 주력했다. 이 때 페넬로사와 협력하여 도쿄미술학교를 만든 것은 오카쿠라 덴신이라는 일본 문부성의 관료였다. 이 둘에 의해 설립된 도쿄미술학교는 처음부터 일본미술이 중심이 되었다. 물론 이 두 사람의 의지만으로, 이와 같은 일이 가능했을 리가 없다. 오히려 이것은 세계 시장에서 일본미술이 잘 팔리는 상품이어서, 서양파에 대하여 ‘동양파’가 우세했기 때문에 가능하다.

가라타니에 의하면 일본의 내셔널리즘은 ‘미학적 의식’에 의해서 성립된다고 한다. 예를 들어 “일본 내셔널리즘의 맹아인 에도 시대의 국학자 모토오리 노리나가에게서도 그것은 지적/도덕적인 시점(인도나 중국에서 유래하는)에 대해 미학적 관점(모노노아와레)를 우위에 놓는 것에서 시작했다.”2)

일본 내셔널리즘이 앞세우는 ‘일본의 전통문화’ 자체가 ‘미학’=‘미에 대한 담론’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러한 미에 대한 담론 중에서도 협의의 ‘미술’에 관한 담론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들이 가진 전통적 일본의 이미지는 서양의 이미지에 기초해있는 것이고...미적인 것으로서의 '일본'은 무엇보다도 협의의 미술과 그것에 관한 담론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3)

따라서 일본의 내셔널리즘을 분석할 때, 이러한 ‘미술’에 관한 담론은 매우 중요하며, 그중에서도 도쿄미술학교의 설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교장까지 지낸 오카쿠라의 미술에 대한 언표, 혹은 '미학적 담론'은 매우 중요하다.

오카쿠라는 미술이 담론투쟁의 장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의 모든 저서들은 ‘미학’에 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인 함의를 띄고 있었다. 오카쿠라의 내셔널리즘은 협의 내셔널리스트의 담론과는 달리 일본의 ‘독자성’을 강조하지 않았고, ‘일본적인 것의 기원’을 일본에서 찾지도 않았으며, 심지어는 일본의 문화(예술), 사상, 종교가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아시아대륙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인정하기도 한다. 그러면 오카쿠라는 왜 가라타니 고진에 의해 내셔널리스트로 분류되는가?

그것은 오카쿠라가 역설적으로 일본이 이러한 외래의 문화(예술), 사상, 종교가 저장되는 ‘저장고’ 혹은 ‘미술관’(‘박물관’)의 역할을 해왔던 것에서 ‘일본의 위대한 특권’이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리고 나서 일본의 ‘위대한 특권’을 발견한다. 역사적으로 인도나 중국 등에서 생겨나 정작 그곳에서는 소멸되어버린 것이 전부 일본에 보전되어 왔다는 것이다....그것들이 전부 남아있는 것은 일본뿐이다. 미술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4)

이렇게 오카쿠라가 일본을 일종의 ‘미술관’으로 본 것은 “일본의 공간에 ‘동양의 역사’를 구성”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가라타니는 흥미롭게도 근대적 역사 자체가 미술관처럼 짜여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은 헤겔철학에서 잘 드러난다.

“주목할 것은 헤겔의 철학체계...가 이런 미술관과 똑같은 배열에 의해 성립하고 있다는 사실이다.”5)

헤겔의 철학이 ‘역사철학’이었다는 것을 상기하자. 그리고 오카쿠라가 페넬로사에게 배운 철학이 바로 헤겔철학이었던 것이다. 오카쿠라는 <동양의 이상>이라는 책에서 "아시아의 역사를 이념의 자기실현으로서의 미술사로 파악"(142)했는데, 이것은 헤겔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오카쿠라는 동시에 모순을 역사의 동력으로 파악하는 헤겔과는 달리, 불이일원론, 즉 다양한 것의 oneness를 주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oneness는 '무의 장소'로서의 '일본'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다.

"오카쿠라가 인도철학이라고 말한 '불이일원론'은 사실 인도가 아니라 이와 같은 일본적 공간에 해당되는 것이다."6)

그래서 이러한 '동양의 미술관으로서의 일본'이라는 오카쿠라의 사고는 사실상 일본중심주의인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이데올로기의 맹아가 되었다.

이와 같이 일본의 내셔널리즘은 ‘미학’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고, 사실상 ‘전통문화’는 근대 이후에 이러한 ‘미학적 담론’을 통해서 구성된 것이다. 이것은 비단 일본의 경우에만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성립한다. 왜냐하면 이성보다는 감성에 중점을 두는 낭만주의는 근대적 이성중심주의를 극복하자고 주장했고, 결국 근대 이전의 ‘전통문화’로 돌아가자는 내셔널리즘에 호소했으며, 철학을 ‘감성화’시켜 ‘미학화’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내셔널리즘과 낭만주의, ‘미학’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미학화’는 오히려 근대 이후에만 가능한 것이고, 이러한 ‘미학적 담론’은 근대 네이션이 만들어지는 데 큰 역할을 했다.

2.
가라타니 고진에 의하면 이렇게 근대에 ‘네이션’이 성립됨으로써 자본=네이션=스테이트의 ‘보로메오의 매듭’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가라타니 고진은 자본주의를 경제적 하부구조로, 네이션과 스테이트를 이에 대응하지만 동시에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상부구조로 보는 시각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며 자본과 네이션, 스테이트가 각기 다른 ‘경제적’ 교환양식에 기반해 있는 ‘하부구조’라고 주장한다.(<네이션과 미학>-서설 1장)

가라타니 고진은 이러한 자본과 네이션, 스테이트의 ‘보로매오의 매듭’을 칸트의 삼비판서에서 나타나는 감성과 오성의 분열을 극복하는 ‘종합’에 비유하며 이러한 종합=매듭짓기를 이루어 내는 것처럼 가정되는 것이 시민사회(감성)와 국가(오성)를 매개하는 ‘상상력’으로서의 네이션이라고 주장한다. 칸트에 의하면 이러한 종합은 상상적인 것으로 실체가 아니지만, 칸트 이후의 낭만파는(그리고 헤겔은) 감성의 우세 속에서 철학을 ‘미학화’함으로써 감성과 오성의 통일을 “사전에 상정”함으로 인해 이러한 상상적인 것을 실체화했고 그것이 법철학 또는 정치철학으로 드러났을 때에는 네이션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실체화하게 된다. 가라타니에 의하면 이렇게 감성과 오성의 통일을 전제하는 사고방식이야말로 ‘미학적인 것’이다.

“감성과 오성 또는 이성이 상상력에 의해 매개된다는 것은 이중의 의미를 갖는다. 첫째로 감성과 이성이 종합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 그와 같은 통합은 적극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결국 상상적인 것(가상)(강조는 필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중략)...칸트는 감성과 오성 또는 이성을 직접적으로 연결짓는 것을 비판했다. 그것은 상상적인 것을 실체화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사고를 ‘미학적’이라고 부르고 싶다. (강조는 필자)”7)

3.
네그리/하트와 마찬가지로 가라타니는 제국과 제국주의를 구별한다. 제국주의는 네이션-스테이트의 확장인 반면 제국은 이러한 네이션-스테이트의 제국주의와는 달리 “성원들을 동질화”하거나 “타민족에게 동질성을 강요”하지 않으며, “지배관계에 저촉되지 않는” 모든 이질성을 포용하는 체제라고 말이다. 이것은 네그리/하트의 제국/제국주의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가라타니는 미국을 ‘제국주의’로 보고 있는다는 점에서 네그리/하트에 반대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아메리카 합중국이 제국주의가 아니라 제국이라는 사고에 찬성할 수 없다. 어떤 국민국가도 국민국가이면서 제국이고자 한다면 제국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8)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네그리/하트의 <제국>에 대한 불성실한 독해에 기인하는 것 같다. 네그리와 하트는 미국이 근대에 형성된 유럽적인 국민국가(네이션-스테이트)와 많은 점에서 그 출발부터 다르다는 것을 <제국>이라는 저서의 여러 페이지를 통하여 기술하고 있다.

(1) 그 출발에 있어서 미국 헌법의 독창성은 “정치권력을 초월적인 영역에 위임함으로써 사회로부터 권력의 근원을 낯설게 하고 소외시킨 근대 유럽의 주권 관념들에 반대로” “권력의 내재성에 대한 생각을 제시”9)한 다는 데에 있다.

(2) 그러나 이렇게 “내재성의 구도 위에서 주권을 구성하는 과정에는 또한 대중 자체의 갈등적이고 다원적인 본성의 산물인 유한성의 경험이 나타나”며, 결국 이러한 생산 원리는 자기 성찰 절차를 낳지만, 이러한 내적 한계를 인식하고 나면 “미국의 새로운 주권 개념은 마치 통제라는 생각과 성찰의 계기를 자신의 헌법에서 없애기를 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외부를 향해 아주 강하게 열린다.(강조는 필자)”10)

따라서 이러한 주권 관념은 “무한한 지형 위에서 작동하는 개방적이고 팽창적인 기획으로 향하”11)게 된다. 이러한 네트워크 권력의 팽창성은 제국주의적인 권력의 팽창주의와 구별해되어야 하는데, 근본적인 차이는 “내재적인 주권 개념이 지닌 팽창성은 배타적이지 않고 포괄적”12)이라는 데에 있다.

“내재적인 주권이 팽창할 때 이러한 새로운 주권은 자신이 직면하는 다른 역능을 합병하거나 파괴하지 않고 반대로 그 역능을 네트워크에 포함시키면서 스스로를 그 역능에 개방한다. 열리는 것은 합의의 기반이며, 따라서 역능 및 대항의 구성적 네트워크를 통해 정체 주권체는 끊임없이 다시 형성된다.”13)

이러한 미국 헌법의 ‘네트워크 권력’은 그러므로 ‘로마 제국’과 많은 면에서 유사하다. 비록 미국은 이러한 헌법정신에 어긋난 채, ‘제국주의적 시기’를 거쳤던 역사를 갖고 있지만, 베트남전쟁에서의 패배와 “공화주의적 원리들로 복귀하도록 하는 압력”과 “강력한 내부의 사회 운동들”에 의해 애초의 헌법정신과 제국적 경향으로 복귀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제국적 경향은 권력의 탈중심화, 이질적인 것에 대한 개방성, 그리고 혼종과 혼성의 문화등을 의미한다. 이것은 중앙집중적 권력, 동질성, 동일성을 특징으로 가지는 제국주의=네이션-스테이트의 경향과는 상반되는 것이다. 이것을 보드리야르는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었다.

"최초의 탈집중에서부터, 그들은 정치적 영역에서는 언제나 연방상태로서, 중앙집권성의 부재로서, 그리고 풍속과 문화의 수준에서는 지방분권화로서, 유럽과의 관계에서 보았을 때 신세계가 갖는 그것과 동일한 이심성으로 남아있다. 미합중국은 연방에 관해 해결 불가능한 문제는 가지고 있지 않은데, 왜냐하면 그들은 처음부터, 그들 역사의 시초부터 뒤섞임의 문화, 혼성의 문화, 민족적/인종적 혼합의 문화, 경쟁과 이질성의 문화였기 때문이다."14)

4.
이렇게 미국은 제국주의가 아니며 미국을 피라미드의 정점으로 하는 글로벌 자본주의 시스템은 ‘제국’이라고 볼 수 있다. 제국주의는 네이션-스테이트의 확장인 반면에 글로벌 자본주의 시스템의 '군주'로서의 미국은 동질성이나 동일성, 초월성, 중심성에 의해 구성되지 않고 차이, 이질성, 내재성, 탈중심성에 의해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라타니 고진의 내셔널리즘론은 제국주의 분석에는 유용하지만, ‘제국’이 지배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혁명적 전략을 수립하는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그러나 역사적 제국주의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 가라타니 고진의 이론을 적용할 수는 있을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제국주의와 전쟁에 대한 그의 연구에 프로이트를 끌어들인다.

가라타니 고진은 <네이션과 미학>에서 속류화된 프로이트 해석을 비판한다. 가라타니가 칼 끝을 겨누는 곳은 아도르노이다. 아도르노에 의하면 초자아는 공동체적 규범이 내면화된 것으로써 프로이트가 초기저작에서 말하는 '검열관'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가라타니에 의하면 후기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초자아의 개념은 <쾌락원칙을 넘어서>라는 논문에서 제출된 '죽음충동'이라는 개념이 정립된 이후에 나타난 것으로, "초자아는 '죽음충동'이 바깥으로 향했을 때의 공격충동이 다시 안으로 향했을 때 형성"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죽음충동, 공격충동, 초자아가 내셔널리즘과는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 사실 상관이 없다. 그러나 가라타니 고진은 이들이 본질적으로 내셔널리즘과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오히려 공격충동과 내셔널리즘이 맞물려 작동하던 1차대전이라는 시대상황에 의한 것으로, 우리는 '전쟁'이라는 역사적 문맥 속에서 공격충동과 내셔널리즘의 관계맺음을 사고해야한다. 세계 1차 대전은 최초의 '총력전'으로서, 인간의 죽음충동과 공격충동이 적나라하게 노출된 전쟁이다. 그리고 이 전쟁은 네이션-스테이트의 확장으로서 제국주의에 의한 것으로 내셔널리즘과 맞물려 작동했다. 그리고 이러한 내셔널리즘은 공격충동의 방향과 그 대상을 설정하는 역할을 했다. 그래서 마치 공격충동과 내셔널리즘이 본질적으로 상호연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이러한 공격충동은 이성으로 제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내부로 향하게 되는 공격충동, 즉 프로이트가 '초자아'라고 부른 것에 의해서만 제어될 수 있다. 그러나 왜 우리는 이러한 공격충동을 초자아에 의해 억제해야 하는 것일까? 물론 가라타니 고진은 이러한 공격충동이 내셔널리즘을 낳게 된다고 말하겠지만, 내 생각에 오히려 배타적 내셔널리즘은 사회적 적대를 완화시키고, 공격충동의 방향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하기 위해 공동의 적을 설정함으로써 작동한다. 공격충동이 내셔널리즘을 초래할 필연성은 없는 것이다.

혹자는 낭만파=내셔널리스트가 감성을 중요시한 것이 공격충동을 중요시하는 경향을 만들어냈다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러한 공격충동은 이미 목적이 내셔널리즘에 의해 설정되어진 공격충동이고, 무수한 공격충동들 중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공격충동 중에는 오히려 네이션을 분열시키는 공격충동도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공격충동과 내셔널리즘을 연결 짓는 사고는 공동체가 그 자체로 개인들의 초자아와 공격충동으로부터 독립된 초자아와 공격충동을 가질 수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실제로 가라타니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는 “공동체도 초자아를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15)

그러나 이렇게 공동체가 독립된 심성을 가진다는 생각은 오류에 불과하며 정신분석학적 해석의 틀을 공동체에 투영한 것에 불과하다. 또한 공동체의 공격충동이 내셔널리즘을 낳는 것은 여기서 말하는 '공동체'를 네이션으로 가정하고 있어야 가능한데, 이것은 '상상의 공동체'를 실체화하는 것 아닌가?

또한 가라타니 고진은 초자아가 ‘외부’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생기며, 따라서 ‘자율적’인 작용을 불러일으키는 것”16)이라고 주장하는데, 이 생각은 과연 올바른 것일까? 우리는 죽음충동이나 공격충동이 왜 바깥으로 향하다가 다시 내부로 향하는지, 그 이유를 물어야 한다. 니체는 그 물음에 대해 답을 제시한다. 그것은 ‘국가’라는 정치조직과 깊은 관련이 있다.

니체는 프로이트가 초자아라고 부른 것을 ‘양심의 가책’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초자아=‘양심의 가책’은 자기가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것으로서, 일종의 병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이 병에 걸리게 된 것일까? 그것은 밖으로 발산되지 못한 공격적인 본능이 안으로 향하게 됨으로서 라고 니체는 말한다. 이렇게 공격적인 본능이 발산되지 않도록 가로막는 것은 바로 국가라는 정치조직이다. 여기서 초자아=‘양심의 가책’의 기원이 국가의 기원과 밀접한 연관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낡은 자유의 본능에 대해서 정치조직(국가)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구축해 놓은 저 무서운 방벽......은 거칠고, 자유롭고, 방랑적인 인간의 저 모든 본능이 인간 자신에게로 향하도록 만들었다. 적의, 잔인, 박해, 공격, 변혁과 파괴의 쾌락-이 모든 것이 이러한 본능의 소유자 자신에게로 방향을 돌리는 것, 이것이 바로 <양심의 가책>의 기원인 것이다.17)

초자아=‘양심의 가책’은 국가에 의해 생성되었고, 국가에 의해 재생산된다. 따라서 우리가 ‘양심의 가책’이라는 병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국가를 폐지해야 한다. ‘초자아’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정신분석학에 의해서가 아니라 국가의 폐지를 통해서이다. 따라서 ‘초자아’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혁명적 정치를 요구한다. 그리고 이러한 혁명적 정치는 내셔널리즘과는 관계가 없다. 오히려 내셔널리즘은 국가와 자본을 향한 대중들의 혁명적 공격충동을 다른 방향으로 돌림으로써 작동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초자아는 이러한 대중들의 공격충동을 발산되지 못하게 하는 가로막는 장애물이라고 볼 수 있다.

5.
이제 언어(언어학)와 내셔널리즘의 관계를 살펴보도록 하자. 가라타니가 전개해나가는 언어(언어학)와 내셔널리즘의 관계에 대한 이론은 매우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상식을 깨뜨린다. 오늘날의 네이션-스테이트는 각기 독립적인 주권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제국’의 해체와 분절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네이션-스테이트가 성립되기 이전에 이른바 ‘민족어’는 존재하지 않았고, 다수의 부족/국가에서 사용되는 문자언어로서의 ‘세계언어’만 존재했다. 그 밑의 하위 언어는 음성언어로서의 여러 ‘속어’들이 존재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속어’는 ‘언어’로 간주되지 않았다. 이것은 음성언어에 대하여 문자언어를 우위에 두는 것으로, 이성을 감성보다 우위에 두는 철학적 태도를 반영한다. 그러나 낭만파 철학자들에 의해 감성이 중시되면서, 음성언어를 문자언어보다 더 중시하게 된다.

“역으로 말하면 근대에 들어와 감성이나 감정이 중시된 것은 문자언어에 대하여 속어(음성언어)가 중시된 것과 대응하고 있다. 음성이 우위에 놓임으로 헤브라이어, 그리스어, 라틴 어와 같은 세계제국 또는 세계종교의 문자언어에 대하여 그때까지 속어로 간주되어온 각 민족의 언어가 동격으로 격상되었다. 낭만파 철학자/언어학자는 언어는 민족정신의 외화라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음성언어의 역사는 곧 민족의 역사라는 견해가 생겼다.”18)

그러나 이러한 민족어는 민족정신의 외화도 아니고, 고대, 중세로부터 전통적으로 내려오고 보존된 언어가 아니다. 이러한 민족어는 오히려 문자 텍스트(특히, 성경)에 대한 ‘번역어’였다가 이것이 국가전체로 확장되면서 민족어가 된 것이다. 즉 민족어가 먼저 존재해서 텍스트를 번역한 것이 아니라, 문자 텍스트에 대한 번역어가 모범적인 민족어가 된 것이다.

“음성중심주의는 근대 네이션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것이다. 그러나 실은 거기에 기만이 있다. 낭만파가 출발하는 음성언어는 제국의 언어(라틴 어, 그리스 어, 헤브라이 어등)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다. 즉 실제는 문자가 선행하고 있음에도 마치 감정 또는 내면에서 직접 나오는 것처럼 생각된다.”19)

그러면 이것은 ‘음성중심주의’에 대한 데리다의 비판을 단순히 반복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가라타니는 데리다가 가까운 과거의 일을 보지 못하고 플라톤의 음성중심주의 까지 거슬러 올라간 데에 대해 비판한다.

“데리다는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에서 서양의 음성중심주의/로고스중심주의의 전통을 플라톤으로 거슬러 올라가 지적했다....음성중심주의는 근대적 네이션의 고유한 현상이기 때문에 지나치게 과거로 소행하여 그것을 발견하는 것은 역으로 문제를 놓치는 것이 된다.”20)

어쨌든 음성언어가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은 낭만파=내셔널리즘의 대두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이렇게 낭만파=내셔널리스트들이 만들어낸 패러다임 속에서 연구했던 언어학자들의 연구는 결국 네이션-스테이트의 확장으로서 제국주의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6.
제국/제국주의에 대한 가라타니의 가치판단은 확고하다. 가라타니는 제국주의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고 조소하면서, 자신이 이상향으로 삼는 ‘세계공화국’을 하나의 ‘제국’이라고 부르고 있다.

“만약 ...제국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칸트가 말하는 각국이 주권을 양도하여 형성되는 ‘세계 공화국’이다.”21)

따라서 가라타니가 목표로 삼는 것은 ‘제국’으로서의 ‘세계공화국’의 건설이다. 혹자는 이러한 ‘제국’이 각각의 네이션-스테이트가 군사적 주권을 방기, 혹은 증여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비현실적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가라타니는 ‘세계공화국’의 이념이 근거하는 칸트의 영구평화론을 들어 이러한 주장을 비판할 것이다. 칸트에 의하면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부로 향하는 공격충동에 의해 인간의 역사는 영구평화 혹은 세계공화국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가라타니 고진은 칸트의 이러한 주장이 국제연맹과 국제연합을 통해 ‘소극적으로 실현’되었음을 보았을 때, 이러한 세계공화국이라는 이념을 비현실적이라고 비웃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공화국으로의 이행도, 그것이 다중에 의한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강제된 것이라면, 그것은 아래로부터의 저항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끊임없는 ‘내전’이 발생할 것이다. 여기서 초자아를 통한 공격충동의 억제는 권력에 봉사하는 일이 될 것이다.

또한 ‘제국’을 통해서 네이션-스테이트를 극복했다고 하더라도 과연 ‘세계공화국’이 ‘자본’을 넘어설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No!이다. 물론 가라타니는 동의하지 않겠지만, 오늘날의 글로벌 자본주의는 하나의 ‘제국’을 이루고 있으며, 또 이러한 제국적 주권의 형태가 아니고서는 자본주의에 대한 다중의 저항을 효과적으로 분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국’으로서의 세계공화국의 건설은 자본주의를 지양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가라타니의 이론은 오늘날 혁명적 실천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잘못된 길로 향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네이션-스테이트와 내셔널리즘에 대한 그의 분석과 비판은 경청할 가치가 있다.

7.
그리고 그의 이러한 분석과 비판은 치명적일 뿐만 아니라 아주 특이하다. 각각의 논문이 우리가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 뿐 아니라, 간결하고도 명확하게 문제의 본질에 육박해 들어간다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그리고 그의 내셔널리즘론의 특이함은 하나의 관점이나 프레임으로 내셔널리즘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관점에서 분석하면서도 그 논리적 일관성을 잃지 않는 데서 나온다.

가라타니는 내셔널리즘을 언어, 공격충동, 미학등과의 연관관계 속에서 파악하지만, 여기에는 어떤 일관성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낭만파의 대두가 내셔널리즘을 탄생시켰고, 또 역으로 내셔널리즘이 낭만파의 패러다임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가라타니의 낭만주의 비판은 계몽주의와 통하는가? 칸트가 계몽주의자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가라타니를 이성의 능력을 신뢰하는 계몽주의자라고 부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가라타니는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이성으로는 해소할 수 없는 초월론적 가상이 존재한다고 주장한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가라타니는 ‘네이션’이 이러한 초월론적 가상이라고 말한다.

"초월론적 가상은 결코 낡은 신학적/형이상학적 사항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실은 명시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칸트는 근대 이전에는 없었던 어떤 초월론적 가상을 발견하고 있다. 그것은 네이션이다."22)

네이션은 이처럼 '가상'이지만, 단순히 그것이 '가상'임을 폭로한다고 해서, 내셔널리즘은 사라지지 않는다. 네이션은 ‘가상’으로서 일종의 '종교'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마르크스의 다음과 같은 '종교비판'을 읽을 필요가 있다.

"종교적 비참은 현실적 비참의 표현이자 현실적 비참에 대한 항의이다. 종교는 곤궁한 피조물의 한숨이며, 무정한 세계의 감정이고 또 비정한 상태의 정신이다.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다. 민중의 환상적 행복인 종교를 폐지한다는 것은 인민의 현실적 행복에 대한 요구이다. 그들에게 그들의 상태에 대한 환상을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그 환상을 필요로 하는 상태를 포기하라는 요구이다. 따라서 종교비판은 종교를 후광으로 삼는 고달픈 현세 비판의 시작이다.“23)

네이션도 종교와 마찬가지로 자본과 국가가 낳는 악몽 같은 "현실적인 비참의 표현이자 현실적 비참에 대한 항의"이다. 따라서 단순한 계몽에 의해서 네이션을 없앨 수 없다. 그러나 네이션은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해결이 아니라 환상적 해결이다. 네이션을 통해 계급대립으로 인한 사회적 분열은 ‘상상적’으로 봉합된다.

네이션이 상상적인 것이고, 종교적인 것이라는 것은 그것이 어떤 상부구조라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상품경제 자체도 일종의 종교이고 환상이지만, 그것은 ‘하부구조’라고 불려지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가라타니가 네이션을 ‘상상력’이라고 부르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 비록 상상에 그치지만 그것은 어떤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며 생산적인 ‘힘’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네이션을 근대의 자본과 국가에 의해 만들어진 상상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존립하기 위해서는 불가결한 구조의 일환으로 보는 것이다. 네이션은 그저 상상(fancy)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국가와 시장사회를 매개하고 종합하는 ‘상상력(imagination)’인 것이다.”24)

네이션은 국가와 자본에 의해 해체되고 파괴된 “호수적 공동체”의 ‘상상적’ 회복이라고 가라타니는 말한다. 그러므로 손쉽게 국가와 자본을 '공동체'에 대한 상상의 실현을 통해 넘어서려는 시도는 결국 내셔널리즘에 흡수되고 만다. 그렇다면 국가와 자본을 넘어서는. 그리고 네이션으로 흡수되지 않는, 새로운 교환양식은 가능한가? 가라타니 고진은 이러한 교환양식을 교환양식X, 혹은 어소시에이션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렇다면 이 어소시에이션은 어떻게 자본=네이션=스테이트를 지양할 수 있는가?

우선 어소시에이션을 구성하는 원리는 자본, 네이션, 스테이트의 그것과는 매우 다르다. 내셔널리즘에서 과거와의 연속성이 중요시된다면, 어소시에이셔니즘은 과거와의 불연속성을 강조한다.

“그것은 공동체의 유대로부터 한 번 잘려나간 개인에 의해서만 열렸던 것이다. 그것은 종래의 공동체와 대립한다.”25)

이처럼 어소시에이션 속에서 개개인은 “공동체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롭다. 또한 어소시에이션에서의 교환은 상호부조적이라는 점에서 상품경제를 넘어선 것이다. 그리고 어소시에이션은 “정치적 국가 조직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국가의 원리와는 결코 양립하지 않는다.”26) 즉 어소시에이션은 정치적 평등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다. 이처럼 어소시에이션은 자본, 국가, 네이션을 넘어서는 동시에, 자유, 평등, 우애라는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표방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어소시에이션은 가라타니에 의하면 “구성적 이념”이 아니라 “규제적 이념”으로서 세가지 교환양식이 사라지지 않는 한 남아 있는 것이며, 역사적으로 이러한 이념은 보편종교에 의해 개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보편종교도 시간이 지나면서 공동체의 제도와 관습과 타협했고, 결국 국가와 공동체를 뒷받침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가라타니 고진은 바로 어소시에이셔니즘이야 말로 마르크스가 말하던 코뮤니즘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떠오르는 것은 또 하나의 ‘코뮤니즘’을 주장하는 네그리/하트이다. 가라타니 고진의 ‘어소시에이션’은 네그리/하트의 ‘다중’개념과 어떤 점에서 같고 어떤 점에서 다른가? 우선 ‘다중’과 ‘어소시에이션’은 상호부조=협력에 의해 만들어지며 배타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러나 이러한 ‘어소시에이션’은 하나의 ‘규제적 이념’이라는 점에서 자기 스스로를 ‘구성’하는 ‘다중’과는 차이가 있다. ‘어소시에이션’이 ‘규제적 이념’이라는 것은 그것이 ‘유토피아’이며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하나의 순수잠재성이라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어소시에이션’은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그것을 현실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다중’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가라타니의 이론을 정밀하게 분석함으로써 어떤 점이 비판되어야 하고 어떤 점이 계승되어야 하는지를 결정해야 한다. 나의 이 작업의 의의는 <네이션과 미학>이라는 저작에 나타난 가라타니의 네이션론/내셔널리즘론을 연구하면서, 그의 네이션론/내셔널리즘론에서 어떤 점이 비판되어야 하고 어떤 점이 계승되어야 하는지를 밝힌 것에 있다. 제국’ 시대에 아직도 ‘제국주의’ 국가가 존재할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혁명적 실천에 오히려 방해가 되지만, 그의 네이션-스테이트와 내셔널리즘에 대한 탁월한 비판과 분석은 우리가 계승해야 한다. 또한 그의 ‘어소시에이션’론은 자본, 네이션, 국가를 넘어서는 운동을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일독의 가치가 있다.

1) 가라타니 고진, 조영일 옮김, “네이션과 미학”,도서출판 b,2009, 132쪽
2) 같은 책, 134쪽
3) 같은 책, 135쪽
4) 같은 책, 145~146쪽
5) 같은 책, 138쪽
6) 같은 책, 147쪽
7) 같은 책, 41~42쪽
8) 같은 책, 58쪽
9) 마이클 하트, 안토니오 네그리,“제국”,이학사, 2001,225쪽
10) 같은 책, 226쪽
11) 같은 책, 같은 쪽
12) 같은 책, 227쪽
13) 같은 책, 227쪽
14) 장 보드리야르,주은우 옮김,“아메리카”,산책자,2009,154쪽
15) “네이션과 미학”,91쪽
16) 같은 책 98쪽
17) 프리드리히 니체, 김태현 역, “도덕의 계보/이 사람을 보라”,청하,1982,p.93
18) “네이션과 미학”, 178쪽
19) 같은 책, 184쪽
20) 같은 책, 188쪽
21) 같은 책, 207쪽
22) 같은 책, 70쪽
23)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최인호 옮김,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제 1권,(박종철출판사, 1991,2쪽)
24) “네이션과 미학”,22쪽
25) 같은 책, 23쪽
26) 같은 책 22~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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