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호](연재)종합적 사회과학자로서의 니체-1

기고
작성자
자율평론
작성일
2018-02-23 12:24
조회
593
<서설>

김상범


1.
니체를 단순히 철학자 혹은 문학가로 규정지을 수 있을까? 니체의 사유에 있어서 아포리즘적인 문체나 영원회귀, 초인 등의 철학적 개념들은 중요한 것이지만, 니체의 창조적인 업적은 전통적인 철학 혹은 문학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의 가장 체계적인 저작중의 하나라 할 수 있는 <도덕의 계보학>를 보자. 이 텍스트에는 도덕 개념과 금욕적 이상에 대한 빛나는 언어학적, 역사학적(계보학적), 인류학적, 경제학적, 정치학적, 종교학적 통찰이 아로새겨 있다. 이처럼 다양한 학문적 통찰이 가득한 니체의 텍스트는 지금까지 그래왔지만 앞으로도 다양한 학문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그리고 더 나아가 새로운 학문들을 창조해낼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 다양한 잠재성에 대해 살펴보고 이렇게 니체의 텍스트를 구성하는 다양성들이 어떻게 한 치의 논리의 어긋남도 없이 연결되고 종합되어 니체의 사상이라는 구조물을 구성하는지 살펴볼 계획이다.

그래서 나는 종합적인 사회과학자로서의 니체-상을 만들어 볼 계획이다. 니체를 ‘뜨거운 정열’의 사상가로, 그래서 사춘기 청소년에게 추천할 만한 사상가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나의 이 말은 의아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니체가 “대담하고 분방한 정신성과 한 치 착오도 없는 변증법적인 엄격성, 필연성”(<선악을 넘어서>)이 한 인물 내에서 공존하는 사상가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니체를 읽을수록 어떤 논리적인 엄격성이 모든 텍스트를 가로질러 흐른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이점에서 우리는 니체를 ‘차갑게’ 읽을 필요가 있다. 니체를 이렇게 ‘차갑게’ 읽는다는 것은 그의 텍스트를 “대담하고 분방하게” 읽으면서 동시에 “한 치 착오도 없는” 논리적 엄격성 속에서 읽는다는 것이며, 이 둘은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해석의 섬세한 기술을 통해서만 우리는 “자유로운 해석”을 획득할 수 있다. 거칠고 조야한 해석은 결코 ‘자유로운 해석’이 아니고, 이러한 해석은 해석하는 자의 정신적 부자유와 무능력을 증명할 뿐이다.

니체의 존재론과 윤리학, 그리고 사회과학 등은 서로 분리될 수 없지만, 그의 사회과학은 독자적인 가치가 있고, 이것은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점이다. 이러한 사회과학은 종래의 형이상학을 비판하는 ‘망치’로서 사용되기도 하며, 종래의 형이상학적 개념들이나 사고방식들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분석하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도 연구될 가치가 있다. 이 연재의 초반부에서는 니체의 사회과학에 대해서 다루고, 후반부에서는 이러한 초반부에서의 연구 성과를 종합하며, 니체의 사상 속에서 이러한 사회과학 이 어떻게 이용되고 작동되는지 밝힐 것이다.

니체의 사상은 다시 읽혀야 한다. 사람들은 그의 존재론에서부터 윤리학을, 그리고 이러한 존재론과 윤리학에서부터 사회과학을 도출하려고 했지만, 그의 존재론은 그 자체로 자연학인 동시에 윤리적인 존재론이고 사회적, 정치적 존재론이기 때문이기 때문에 그의 사회과학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의 존재론을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물론 그가 '예술'과 '예술적 창조'를 모든 분야에서 강조했고, 이러한 예술적 창조력이 없는 학문을 "불임의 학문"이라고 비웃었을지라도, 이러한 예술적 창조는 어떤 자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필연에 좇아 행할 때"(<선악을 넘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니체가 강조했고, 이러한 예술은 무질서가 아니라 "창조적 배치, 배열, 형성"(<선악을 넘어서>)이라는 점을 니체가 강조했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따라서 니체가 학문을 '예술적인 것'으로 만들어야한다고 주장했을 때 그것은 모든 학문이 감성화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배치와 배열을 구성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배치와 배열은 섬세한 해석의 기술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2.
물론 우리는 니체가 <도덕의 계보학> 제 3논문에서 학문(과학)이 (해석이 배제된) ‘객관적 진리’에 대한 신앙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금욕적 이상의 “가장 고귀한 형태”에 불과하다고 말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마침내 부정도 긍정도 엄격하게 금하게 되는 지적 스토아주의, 사실 앞에, 냉엄한 사실 앞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려고 하는 자세, ‘작은 사실’의 저 숙명론...해석 일반에 대한...저 단념-이러한 것들은 대체적으로 말해서 관능의 부정과 마찬가지로 덕의 금욕주의를 잘 표현하고 있다....진리에의 저 무조건적 의지는,...금욕적 이상 자체에 대한 신앙이다.”(<도덕의 계보학>)

그러나 이러한 해석이 배제된 순수한 객관적 진리와 객관적 사실에 대한 부정은 사회과학의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그가 <도덕의 계보학> 제 1,2,3 논문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 ‘사회과학’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니체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사회과학의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그리고 심지어 니체는 ‘객관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객관성의 기준을 제시한다. 다소 길기는 하지만 인용해보도록 하자.

“결국 인식하는 자인 우리는 정신이 너무 오랫동안 겉보기에 방자하고 무익하다고 자기 자신에 화를 내게 한 익숙한 관점과 가치평가를 그토록 단호하게 역전시킨 것에 결국 고맙게 생각하도록 하자. 그런 식으로 한 번 다르게 보고, 다르게 보려고 하는 것은 언젠가는 ‘객관성’을 얻기 위한 지성의 제법 엄한 훈련이며 준비이다. 여기서 ‘객관성’이란 ‘무관심한 직관’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고,...지성의 찬반을 마음대로 통제해서 적절하게 조절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관점과 정동해석의 상이성을 인식을 얻는데 이용할 줄 알게 된다....우리는 이제부터 ‘순수하고 의지가 없으며, 무시간적인 하나의 인식주관’을 설정한 낡은 개념의 허구를 더욱 경계하도록 하자. ‘순수이성’이니 ‘절대적인 정신성’이니 ‘인식 그 자체’와 같은 모순적인 개념의 촉수를 경계하도록 하자. 여기서는 언제나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하나의 눈이 있음을 생각하도록 요구받는다. 이는 결코 어떤 방향을 가져서는 안 되는 눈이고, 그 눈의 경우에 보는 것을 일단 무언가로 보는 행위로 만드는 능동적이고 해석적인 힘은 저지되어야 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오직 관점주의적 시각과 오직 관점주의적 ‘인식행위’만이 존재할 뿐이다.

우리가 어떤 사물에 대해 더 많은 정동이 발언할 기회를 얻게 할수록, 보다 많은 눈과, 색다른 눈들로 하여금 한 사물을 관찰하게끔 하면 할수록, 이러한 사물에 대한 우리의 ‘개념’이나 우리의 ‘객관성’은 더욱 완벽해질 것이다. 그러나 의지를 통틀어 제거하고, 정동을 모조리 없애 버리는 일, 만약 우리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면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지성을 거세한다는 의미가 아닐까?”(<도덕의 계보학>)

니체는 “능동적이고 해석적인 힘”이 제거된 순수의식이 실재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을 ‘객관성’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오히려 ‘더 ‘다양한 관점을 통과해서’ 이 관점들에 의해 구성된 세계의 '단면'들을 입체적으로 종합하여 세계를 볼 수 있는 능력을 니체는 객관성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즉 니체는 ‘무관심할 수 있는 주관의 능력’이 아니라 오히려 “관점과 정동해석의 상이성”을 인식을 얻는데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객관성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객관성이라는 것은 해석을 통해서만, 그리고 다양한 관점들을 통과하고 이러한 관점들 각각에 의해 구성된 세계의 다양한 모습들='단면'들을 입체적으로 종합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종합’이란 개별적인 관점들을 뒤섞는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각각의 관점들의 개별성을 유지하게 하면서 이러한 관점들의 차이를 통해서 하나의 고차원적이고 입체적인 '인식된 세계'를 구성하는 과정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보편성=객관성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시차', 즉 관점들=언어체계들의 '차이'를 통과해야 한다고 말하는 점에서, 니체와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가라타니 고진, 이신철 옮김, <트랜스크리틱>(도서출판 b, 2013) 참조) 그러나 가라타니 고진은 이러한 '시차'를 통해서 어떻게 인식의 객관성이나 보편성에 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있다. 그는 '시차' 속에서 객관성이나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 즉 이러한 인식주체 내부의 여러 관점들에 의해 구성되고 포착된 것들이 '종합'되는 것이 일종의 '목숨을 건 도약'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러한 '종합'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인식이 가능하겠는가? 우리는 <순수이성비판>에 주목하고 있는 가라타니 고진과 달리 <판단력 비판>에서 칸트가 개진한 능력들의 '자유로운 일치'로서의'종합'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들뢰즈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 한명의 칸트 해석자이자 니체 해석자인 들뢰즈는 역설적으로 능력들 사이의 '차이'와 '간극'이야말로 '불일치의 일치'로서 '종합'이 이루어지기 위한 조건임을 강조한다. 마찬가지로 관점들 사이의 '차이'와 '간극'이야말로 '종합'의 조건인 것이다. 종합은 이러한 '차이'와 '간극'을 끝까지 밀어붙임으로써 도달하는 일치와 동일성이다.

우리는 '시차'에 대한 니체의 주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되면 놀라운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니체의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동일하게 보편적으로 '객관적 진리'라고 인정하는 관점과는 '다른 관점'들을 제시하고 (원래의 관점을 포함하여) 이러한 다양한 관점들이 빚어낸 세계의 다양한 모습들을 종합할 수록 우리는 '객관성'에 더 다가가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해석은 원래의 관점을 포함해서 최소한 둘 이상의 관점을 통과하고 이러한 관점들에 의해 표현되는 세계의 모습들을 종합함으로써,'관점과 정동해석의 상이성'을 인식을 얻는데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니체가 '정동'과 '정동해석'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해서 니체에게 있어서 지성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니체에게 있어서 지성 또는 이성은 해석이라는 인식행위에 매우 중요하다. 비록 정동의 촉발이 없으면 지성도 없어지지만 결국 해석이라는 것은 언어체계에 의존하고 이러한 언어체계를 창조하고 유지하는 것은 '지성' 또는 '이성'이기 때문이다. 니체가 강조했던 것은 지성과 정동이 상호보완 관계에 있다는 것이지, 어느 하나를 배제하자고 니체가 주장했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여기서 '정동해석'이라는 것은 '정동의 촉발에 의한 (무의식적, 의식적) 이성 또는 지성의 해석'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동해석’의 상이성을 이용하는 능력을 니체는 ‘객관성’이라고 부르고 있다. 따라서 니체가 '감성중심주의자', 혹은 ‘주관주의자’라고 볼 수는 없다.

니체에게 있어서 해석행위는 인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을 억제하는' 주류적 해석방식과는 다른 해석들, 그러나 더 고차원적이고 '다양성을 종합하는' 해석들을 제시함으로써 지배적인 합의의 권력과 질서에 균열을 가하는 실천이기도 하다. 이것은 혁명적 행위이고, 따라서 기존의 사회과학(적 해석)을 넘어서는 사회과학(적 해석)은 하나의 혁명적 도구가 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혁명'은 정치적 혁명과 맞닿아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토마스 쿤이 '과학혁명'이라고 할 때와 같이 사유 내에서의 '혁명'을 지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혁명적인 해석행위는 물론 '자유로운 행위'이지만 그것은 한 치의 착오도 없는 논리적 엄격성과 필연성을 전제로 하며, 앞에서 보듯이 이러한 '자유'와 '필연성'은 모순되지 않는다. 더 높은 정신적 자유를 위해 니체의 저작을 통해 더 정밀하고 섬세하며 새로운 사회과학(적 해석)을 창안하는 것이 이 책의 목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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